리-프레시. 민간 조사원 일을 시작한 후로 7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이 일정을 취소해본 적이 없었다. 휴가 일정이 매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알아차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걸 ‘포화 상태’라고 불렀다. ‘포화 상태’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14
“이 계통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소개해달라는데, 그건 바로 자네 아닌가. 게다가 내일 아침 비행기로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내게 중요한 손님이니 다정하게 대해주게. 일을 꼭 맡아서 할 필욘 없어. 물론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이야기를 들어만 주고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자네 장기 중 하나니까. 내 체면이 깎이지만 않게 해달라는 말이네.” --- p.23
“중요한 건,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이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땐 멀쩡하십니다만 사실은 암세포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아주 천천히 파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마지막 화이트 라벨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 p.39
소피아 마지엘은 자신을 알리샤 마지엘의 엄마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알리샤가 죽었고, 알리샤가 당신에게 남긴 유품이 있으니, 그걸 받으러 올 용의가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국제 소포로 보내줄 수도 있지만, 그곳으로 와서 알리샤의 죽음을 애도하고 직접 유품을 전해 받을 수 있는지,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고 쓰고 있었다.
그녀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알리샤가 죽었다고? --- p.52
그는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응시했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조사해야 하는 것, 느껴야 하는 것, 판단해야 하는 것이 명확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리옹 시가지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탄성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모든 게 분명하지가 않았고, 그의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그런 식의 감정은 처음이었다. --- p.96
진짜 ‘시선’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건 누구의 눈알일까? 위장, 그는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어떤 관계를 ‘위장’하고 싶어 한다면, 이를테면―그는 어떤 관계를 예로 들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 어떤 부모가 남들 앞에서 좋은 부모인 척한다면 그들이 진짜로 숨기고 싶어 하는 건 누구의 모습일까? 그는 그게 부모 자신을 위장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지도 몰랐다. --- p.153
그는 언제나 리-프레시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병 속의 물이 점점 차올라서, ‘포화 상태’에 다다르기 전에 병을 비워버리는 거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제껏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건 텅 비어 있는 병 속에 무언가가 점점 차오르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병 속이 비워져 있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언제나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병 속의 물이 언제나 균형을 맞출 수 있느냐는 거였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러니까, 그건 단 한 방울과 관련된 문제였다. 단 한 방울 때문에 너무 많은 게 달라질 수도 있었다.
--- p.15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