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용맹한 기자 토니도 늘 한 가지에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다. 나는 작은 키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두어 번 토니를 위로했다. 일할 때는 조금 거만해보이기까지 한 남자가 신체조건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마음이 찡했다.
토니가 반드시 취재원이 대답하기 곤란해 하는 질문을 해야 하고, 늘 특종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하고, 위험한 상황에 무분별하게 뛰어드는 허세를 부리는 건 모두 왜소한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토니는 늘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창문에 코를 박고 소외감을 주는 세상을 바라보는 영원한 이방인이랄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의 재기 넘치는 우월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묘한 열등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토니가 영국인 동료와 마주했을 때 그런 점들을 더욱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는 「데일리텔레그래프」 지의 특파원 윌슨이었다. 윌슨은 30대 중반인데도 머리숱이 적고, 살이 투실투실해 토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햇빛에 놓아둔 카망베르치즈 덩어리’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인생이 변하는 속도에 아연실색했다. 운명은 그런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인생의 궤도가 일정한 코스로 흘러간다고(특히 중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생각하며 여행을 한다. 하지만 그러다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가 지속되면 자기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위험지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러다 의식할 새도 없이 살아 있는 유일한 혈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리게 된다. 임신했을 뿐만 아니라 곧…….
“결혼한다고?”
샌디는 정말 충격 받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는 게 현실적인 일처리 같았어.”
내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서른일곱 살에 처음으로 임신했단 말이지?”
“믿어줘, 우연히 그렇게 됐어.”
“그럼, 믿지. 믿다마다. 난 네가 작정하고 임신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토니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니?”
“아주 좋아했어. 사실 나보다 더 기쁘게 받아들였어. 심지어 ‘정착하고 싶다’는 무시무시한 말도 하더라니까. 그것도 긍정적인 태도로.”
“토니가 너보다는 인생을 잘 아는 것 같다.”
“언니, 누구나 언젠가는 정착해야 된다는 거야?”
마취제 때문에 한동안 삶에서 밀려나는 기분은 정말 기이했다. 마취 당하면 꿈을 꾸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도 딱히 의식되지 않고 공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마취상태에서는 여러 생각, 두려움, 근심 따위가 마음을 침범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쉽게 스며드는 상태인 수면과는 달리, 마취 상태에서는 화학적인 활기만 유지될 뿐이다. 한 시간 동안 몸부림치는 아픔을 겪은 후라 내게는 그런 상태가 딱 좋았다.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는…….
내가 누워 있는 장소가 어딘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처음 눈에 보인 건 머리 위의 불 켜진 형광등이었다. 눈이 반쯤 붙어 모든 게 뿌옇고 흐릿해 보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머리에 안개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모든 목소리가 납덩이처럼 눌러대는 듯했고, 의식을 찾은 몇 분 동안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병원, 병동, 침대, 아픈 머리, 아픈 몸, 아기.
“간호사!”
나는 허둥지둥 침대 옆의 단추를 찾으며 소리쳤다. 그러다가 양팔에 여러 가지 관들을 꽂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반신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다.
아기를 어르고 흔들어 달래주고 나서 안고 복도를 거닐었다. 아기에게 고무젖꼭지를 물리고 말라버린 젖을 빨게 하고, 기저귀를 갈고, 더 흔들어주고, 유모차에 태워 거리를 산책시켰다. 침대에 눕히고, 그놈의 흔들의자에 앉혀 내리 30분 동안 흔들어대고…….
끝없는 울음소리가 울리길 세 시간에 이르렀을 때 나는 긴급 불시착 상태로 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1분간 잭의 지긋지긋한 울음소리를 듣느니 2층 창문으로 몸을 던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토니의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난다. 그녀는 토니가 회의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긴급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토니가 편집장과 같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요, 긴급 상황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무슨 일인지 제가 전해드릴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더할 수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이에게 앞으로 육십 분 안에 집에 오지 않으면 내가 우리 아들을 죽일 거라 말해주세요.”
“아니, 딘은 어쩌면 드라마를 원했던 거야.”
언니는 몹시 궁금해 하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드라마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딘은 언니와 아이들에게 완벽하게 만족했을 거야. 그런데 그때 그 여자가 나타나서…….”
“그래서?”
“드라마를 연출할 기회를 보게 된 거지. 숲에서의 새로운 삶이라니, 정말이지 로맨틱하잖아. 여행자들을 안내해 산을 오르내리는 일 이 얼마나 권태로운 일인지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지. 권태야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게 바로 권태니까. 권태가 바로 생의 부질없음을 강조하기 때문이지. 드라마틱한 삶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건 바로 그 때문이야. 평범한 일상에 매몰돼 소중한 삶을 끝내기보다는 생이라는 대형드라마를 자기가 직접 연출하고 주인공을 맡는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짜릿하겠어.”
난 양손으로 대문을 잡았다. 당장 달려가 내 아들을 찾아오고 싶었지만 난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아들을 안고 있는 여자를 보는 건 내게 엄청난 공포감을 안겼다. 내가 여기서 난동을 부린다면 나에게 불리한 탄환을 그들에게 대주는 꼴이 될 것이다. 불안한 깨달음에 무력한 공포감이 더해졌다. 난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조차 미친 짓이라는 걸. 훗날 엄청난 화근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걸, 하지만 난 알아야 했다. 내 눈으로 봐야 했다. 잭을 봐야 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집으로 향했다.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의 그녀는 다시 잭을 끌어안고 있었다.
“토니!”
그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그 자리를 피했다. 서둘러 차로 간 나는 급격히 후진한 다음 급히 유턴해 쌩하니 차도를 내려갔다.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니, 그녀 옆에서 사라지는 내 차를 쳐다보는 토니의 모습이 보였다.
“저는 샐리 굿차일드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 그녀에게 악감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처지를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과연 지난 몇 달 간의 공포가 어땠을지 상상만 할 뿐입니다. 틀림없이 그녀는 지난 일을 후회할 것입니다. 신은 아시겠지만 저는 재활과 용서를 믿습니다. 저는 그녀가 잭과 만나는 걸 막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장차 공개적인 면접을 환영할 겁니다.”
덱스터가 그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26시간 동안 지구 끝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시차에 시달리고 벼룩이 득실대는 모텔에 묵으며 버스를 타고 그녀의 궁궐 같은 집으로 간다. 오스트레일리아 사투리를 쓰는 남자 애가 나에게 인사하고는 덱스터에게 몸을 돌리고 말하겠지. ‘엄마, 난 이 아줌마와 외출하기 싫은데.’
다이앤 덱스터는 루신다 포드의 심문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굿차일드 씨가 완전히 회복해 장차 어느 날인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확히 우리가 언제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말해줄까?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아.
매브 도허티는 영리했다. 그녀는 대본을 고수했다. 어차피 트레이노어 판사한테는 통하지 않을 테니 동정심을 유발하지도 않았고, 함부로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목조목 짚어가며 토니와의 회오리바람 같았던 관계와 30대 후반에 임신했을 때의 감정을 설명하게 했다.
나는 힘겨웠던 임신 기간과 잭이 태어난 후 중환자실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공포감, 내가 정신적으로 ‘검은 늪’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사실도 이야기하게 했다.
“혹시 ‘어두운 숲 속에서’라는 표현을 아시나요?”
내가 말했다.
트레이노어 판사가 끼어들었다.
“단테지요.”
“그렇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입니다(《신곡》 지옥 편 앞부분에 나온다 : 옮긴이). 제가 있는 곳을 적절히 표현한 구절입니다.”
매브 도허티가 물었다.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환한 순간, 이전에 의료진에게 고함치거나 아들에 대해 두 차례의 불온한 말을 하거나 수면제를 복용하고 수유한 일을 어떻게 느꼈습니까?”
“무시무시했어요. 무시무시한 것 이상이었지요. 지금도 그 일들을 생각하면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당시 제가 병을 앓았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남편의 처신에 대해 분노를 느낍니까?”
“네, 그렇습니다. 또한 제가 당한 일이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경험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지독하게 불공정하다고 느낍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기분이 더욱 참담했습니다. 잭이 제 아들이고, 제 삶의 중심이었으니까요. 아기를 빼앗기게 된 이유들은 제가 느끼기에는 무척이나 부당할뿐더러 모두가 날조된 진실때문입니다.”
나는 마지막 증언을 하며 증인석의 난간을 꽉 붙잡았다. 손을 놓으면 손을 마구 떤다는 걸 법정 전체에 들킬 것 같아서였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