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처음 본 곳은 형사재판이 열리는 법정이었다.
---「첫 문장」중에서
까마귀가 운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가라스마의 재판에서 파란이 이는 일은 드물지 않다. 절차를 정확히 기록하는 것도 서기관이 하는 일이다 보니 돌발 상황이 생기면 대단히 난처하다.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해도 좋다. 교도관이 피고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검사, 변호인, 피고인. 이제 재판관이 모습을 드러내면 재판이 시작된다. 바라건대 문제없이 폐정을 맞이할 수 있기를.
--- pp.22~23
즉 가장 큰 쟁점은 A의 진술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진실을 말했는가, 거짓임을 알고 거짓을 말했는가, 거짓을 진실로 알고 말했는가. 결론은 이 세 가지로 분류되고, 진술의 신뢰성을 쟁점으로 삼는 측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둘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뢰성을 판단할 때도 증거와 일치하는지 여부가 큰 의미를 갖는다.
--- p.85
그때의 조건과 순서는 어땠을까. 날씨나 온도까지 신경 쓰면 끝이 없다. 우선은 직감적으로 중요하다 싶은 것을 픽업했다.
1번, 법복을 입고 법대 뒤의 문을 열었다.
2번, 재판에서 무죄 주장이 나왔다.
3번, 재판이 끝난 후에 방청인과 질의응답이 있었다.
4번, 피고인의 몸이 안 좋아져서 재판이 중지됐다.
5번, ….
열거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나온다. 특히 1번은 서기관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이것만 가지고 시공의 문이 열린다면 법원은 시간 여행자로 도배된다.
--- p.121
다른 문으로 나가야 할까. 그러면 시공의 문은 열리지 않을지도….
타임 슬립을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기억대로 움직이면 미래는 유지된다. 섣부른 행동이 예기치 못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걸 지난번 실수로 통감했다.
몇 초 망설이다 문고리를 잡고 비틀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대로 통로로 나왔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 pp.147~148
5년 전과 똑같은 범행 장소.
피고인과 피해자의 이름이 뒤바뀌었다.
그리고 죄명이…,
내가 아는 미래가 아니다.
예기치 못한 사태를 초래할 건 각오했다.
친구를 잃은 첫 번째 타임 슬립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 광경은…,
국민참여재판에서 소메야 린이 살인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심장이 세차게 뛴다.
목소리조차 낼 수 없다.
미래를 고쳐 쓴 탓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걸까.
--- pp.193~194
“진실에 입각해 심판하는 게 재판관이 할 일이잖소. 판결을 선고한 후에 실수한 걸 후회해봤자 과거로는 돌아가지 못해. 이미 손쓰기엔 늦었단 걸 잘 알 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이 심판하는 건 피고인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오.”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로 책임을 느낀다면, 나 같은 사람을 늘리지 마시오.”
--- p.211
스테인드글라스 조명이 설치된 쪽빛 법정.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내벽으로 둘러싸인 홍련 법정. 새 청사를 ‘쪽탑’, 옛 청사를 ‘홍탑’이라 생각하고 인접한 두 개의 건물을 머릿속에 그렸다. 본래는 같은 시기에 존재할 수 없는 신구 청사, 쪽탑과 홍탑을 자유롭게 오갈 수는 없으며, 일정한 조건을 충족한 경우에만 시공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타임 슬립을 거듭하면서 탑의 최상층을 향해 올라간다.
--- p.226
타임 슬립으로 인해 과거가 여러 개 생겨났다.
“다만 그것들은 잠정적인 과거일 뿐이고, 타임 슬립에서 벗어날 때는 어느 하나의 과거로 확정될 거야. 더 단순히 말하면, 다카히사 씨의 유죄판결과 무죄판결이 동시에 존재하는 미래에 당도하는 일은 없어.”
최상층까지 다 오르면 법정에서 진행되던 재판도 끝을 맞이한다. 선택되지 않은 판결은 그 후의 시간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 p.338
5년 후의 미래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쁜 미래는 아니야. 네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면 틀림없이 같은 미래에 당도할 거야.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그래서 괜한 정보는 말해주지 말고 가만히 두기로 했어.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무난하고 확실한 선택. 그게 내가 종사하는 직업의 철칙이야. 그런데 이제 난 위험을 무릅쓰려고 해. 그러면 네 미래가 영향을 받을지도 몰라. 내 할 말만 해서, 게다가 상의도 없이 결정해서 정말 미안해. 여기서부터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쓸게.
--- pp.406~407
“전 이상입니다. 다른 의견이 없다면 폐정하겠습니다.”
세 알의 씨앗이 뿌려졌다.
소메야 다카히사, 가노 도모루, 나… 우구이 스구루.
한 알이면 된다. 싹이 터서 미래에 영향을 줄 정도로 성장하기까지.
분명,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 p.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