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진격해 오던 그 해 3월, 독일군에게 맞서기 위해 앞으로 나선 사람은 오직 우리 할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한 사람만이 최면을 걸어, 진격해 오는 독일군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독일군 앞에 나서셨다. 할아버지는 독일군 기계화 부대의 선봉을 이끄는 선도 탱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이 탱크 포탑에는 해골과 열십자 뼈 모양의 배지가 달린, 검정 베레모를 쓴 독일 군인이 상반신만 내놓은 채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앞으로 걸어가셨다.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내밀고 독일 군인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탱크를 돌려 돌아가라!”라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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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차가 덜컹거렸다. 눈 덮인 벌판이 하얗게 빛나면서 뒤로 멀어져 갔다. 눈이 녹으면서 눈 입자 하나하나가 영롱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선로 옆 도랑에 죽은 말 세 마리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밤에 독일 병사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차량 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이제 죽은 말들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처럼 뻣뻣하게 굳은 네 다리를 하늘로 쭉 편 채, 선로 옆 도랑에 처박힌 신세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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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높은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서서, 각자 붉은색 페인트가 가득 든 양동이를 발밑에 둔 채, 페인트 브러시를 하나씩 들고, 같은 울타리를, 그녀는 그녀 쪽에서, 나는 내 쪽에서 칠해 나갔다. (중략) 2km쯤 칠해 나간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 높이의 울타리를 칠하면서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맞은편에서 그녀 역시 내 입술 높이의 울타리를 칠하면서 자기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 눈을 은근하게 바라보았다. 마침 그곳은 도랑이었고 주위에는 키가 큰 명아주가 자라 있었다. 나는 입을 삐죽이 앞으로 내밀어 칠하고 있던 철조망 사이로 그녀와 입맞춤을 했다. 조금 후 눈을 떠보니, 그녀의 입 언저리에 철조망 눈 모양의 붉은색 페인트 줄무늬가 찍혀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우리는 아주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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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환한 불빛이 내게 쏟아졌다. 그 불빛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내 몸은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온 땅이 흔들리고, 천둥이 내리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나 빅토리아의 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상황이었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며 창문이 덜컹거렸다. 역무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새로운 인생에 영광스럽게, 성공적으로 진입한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울리는 것 같았다. 전신기도 저 혼자 모스 부호를 날리기 시작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 역무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역장의 비둘기들도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듯 일제히 울어 댔다. 그때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멀리 지평선 위로 형형색색의 화염이 활활 타올랐다. 역사驛舍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리며 바닥까지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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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맞으며 신호등 위에 앉아 있었다. 싸락눈의 차가운 눈덩이가 나를 쪼아대는 것이 느껴졌다. 눈발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이미 그 물건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째깍대는 기계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기관차가 내 밑을 지나갔다. (중략) 들고 있던 폭탄을 마치 개울에 꽃송이를 던지는 것처럼 슬며시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정확하게 숫자를 세고 있다가, 목표 차량이 내 밑을 지나갈 때 그것을 던졌다. 폭탄은 투하하기로 정해진 차량의 한가운데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 작은 물건은 그곳에 있는 물건들과 함께 잠시 놓여 있다가, 이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를 송두리째 날려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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