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정人情은 눈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인정도 없어지고, 인정이 없어지면 눈에서도 멀어집니다. 하나가 어색하면 나머지도 어색합니다. 단지 사적인 친지 간의 얘기가 아닙니다. 조직의 목표가 우선인 직장에도 여지가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원칙과 규율이 엄해도 예외와 제외가 있었죠. 직장도 눈으로 마주하니 인정이 쌓이고, 몸으로 같이하니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쌓이는 곳간과 느끼는 통로가 차단되고 있습니다. 비대면으로 원격에서 업무와 소통이 일어납니다. 다양한 시스템과 솔루션으로 작업방식과 업무성과가 빠짐없이 기록됩니다. 웬만한 인정으로는 이해되지도, 양해되지도 않습니다.
혹시 재택근무나 원격수업으로 잠시의 여유를 즐겼었나요? 비대면, 온라인으로 잠깐의 여유를 구가했나요?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거리 두는 세상에서, 그런 업무관계에서는 그간의 인간적 도리가 사라집니다. 좋든 싫든 더욱 기계적이고 체계적인 세상이 됩니다. 냉정한 세상이 됩니다. 냉정하고 투명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 p.012, 「시작하며_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 중에서
마스크가 이렇게 귀한 줄 몰랐습니다. 몰랐던 것이 또 있습니다. 답답하기는 해도, 자꾸 쓰라 하니 때론 짜증 나긴 해도, 편한 점이 있더라고요. 왠지 모를 편안함 말입니다. 나의 얼굴, 표정,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지 않는 편안함. 고작 마스크 하나가 뭐라고, 고작 마스크 한 조각이 나와 세상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편한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선글라스도 그렇습니다. 따가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멋지게 보이기 위해 쓰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선글라스는 사이존재로 기능합니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막아주면서도 나의 시선, 나의 사념에 자유를 줍니다. 나를 지켜주는 느낌입니다.
핵심은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남을 배려하기 위해 마스크를 씁니다. 내가 결정한 나의 선택입니다. 마스크를 끼든, 선글라스를 쓰든, 모두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편안함입니다. 조그마한 물건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물리적 거리가 크고 널찍한 정신적인 공간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정신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사이존재로 ‘디스턴싱’을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형식의 사이존재로 ‘관계의 디스턴싱’을 하겠습니다.
--- p.020, 「시작하며_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 중에서
이 세상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가 ‘우리’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관계가 있어 내 앞에 다가왔고,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내 곁에 깊이 들어오는 사람들입니다. (...) 주변에 있는 그들의 대다수는 악마도 악녀도 아닙니다. 물론 천사도 아니겠지요. 그저 나처럼 악마와 천사 사이의 ‘중간계’에 살고, 한 번씩 악마도 되고 천사도 될 뿐입니다. 서로 공감하다가, 그리하여 거침없이 우리, 우리 하다가도 한순간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사람들일 뿐입니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르고, 나와 다르지만 나와 같은 이 오묘함이 세상을 어렵게 만듭니다.
--- p.022, 「시작하며_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 중에서
요즘 누가 당신을 휘두르나요? 기분 잡치는 한마디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그들의 질타에 의기소침해지고, 그들의 지적에 인생의 목표를 바꾸기도 하나요? 그들이 나를 평가하게 하고, 그 평가에 의존하며 살고 있나요? 혹시 나의 하루가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좌지우지되나요?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당신은 이미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서 비록 성직자라 하더라도 그중에는 훌륭하지 않은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하물며 세속의 범인인 우리의 애인, 친구, 부모, 스승이 늘 훌륭하기만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 p.040, 「누가 나를 휘두르는가?」 중에서
인간은 소유욕이든 성취욕이든, 무언가를 끊임없이 모으고 채워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쌓아가는 본성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권장할 만한 것이죠. (…) 그런데 문제는 쌓아가는 것이 지나치게 편중될 때 발생합니다. 일 때문에 사랑을 등한히 하고, 사랑에 빠져서 일을 망치면 문제입니다. 사고와 마음가짐, 신체와 몸가짐 모두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모으고 채워가고 쌓아가는 것들이 편중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균형추의 임무가 있습니다. 동원하되 치우치지 않게 동원하는 것을 균형추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으려면 균형추 역할을 하는 사이존재를 지녀야 합니다. 균형 잡기 위해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이존재의 역할은 모으고 채우고 그래서 쌓아가는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열심히 동원합니다. 그러나 동원하는 것들을, 동원된 상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서서 냉정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 p.103, 「치우치지 않으려면 지녀야 할 사이존재」 중에서
사람마다 스스로에게 설정하는 기준치가 있습니다. 이 기준치의 높고 낮음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다릅니다. 매사에 ‘이 정도는 되어야지.’와 ‘이 정도면 됐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죠. 자신에게 설정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사람은 힘들게 살아갑니다. 기대치에 맞추려고 자신을 들들 볶습니다. 반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낮은 것도 보기 안 좋습니다. 노력하며 발전하는 모습이 없는 사람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으니까요.
--- p.127, 「모든 것은 기대치의 문제」 중에서
손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손해를 본 계산서를 펼쳐드니 화가 버럭 납니다. 사실 손해 본 숫자보다는 손해 보았다는 느낌이 더욱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왠지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내가 바보가 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에 딸깍 올라가는 미터기 요금이라 봤자 120원입니다. 하지만 ‘에잇’ 하는 속상한 기분은 1만 2,000원어치는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와 세상에 기대하는 만큼 받아야 손해 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기대하는 만큼’이라는 것은 내가 한 만큼, 내가 준 만큼으로 정해집니다. 상대와 주고받는 것이 대충 맞고, 서로 기대하는 바가 얼추 맞아떨어져야 손해 보지 않는 관계입니다. 기대치, 수준, 눈높이를 조정하고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와 당신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그 사이에 상식, 표준, 룰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앞에서 이야기했죠.
--- p.139, 「명심하세요, 눈높이 관리」 중에서
클래식 음악에는 훌륭한 변주곡들이 많습니다. 원형, 뼈대, 본질을 찾아보는 훌륭한 연습이 되기도 합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추천합니다. 하나의 주제와 이어지는 30개의 변주곡이 아름답습니다. 음악은, 예술은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꼴통 되지 않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본질을 탐구하다 보면 원형에 도달하고, 이 원형으로 서로 다른 것들의 근원적인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위레벨, 좀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메타레벨meta-level’에서의 유사성을 끄집어내게 됩니다. 전형을 지양하고 원형을 지향하다 보면, 쉽게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의 연결 맥락이 파악됩니다. 다른 것을 같게 보는 사이존재가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통찰의 순간이기도 하구요.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충분히 시도해봄 직합니다. 충분한 보상이 기다리니까요. 운수대통과 대박 비즈니스는 통찰에서 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냥 운수 소관이라 치부하지 않는다면요.
--- p.263, 「통찰력이 탐나세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