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니쉬 찬드라 모한 자인(힌디어: ????? ?????? ???? ???, 1931년 12월 11일 ~ 1990년 1월 19일)은 인도의 신비가, 구루 및 철학자이다. 1960년대 이후로 아차리아 라즈니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자신을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라 불렀고, 1989년에 '오쇼'라는 이름을 새로 택하여 그 뒤로는 주로 오쇼 라즈니쉬로 불린다.오쇼는 1960년대에 철학 교수로서 인도를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그는 사회주의와 마하트마 간디 및 기성 종교에 반대하고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970년 오쇼는 제자를 받으며 정신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세계의 종교적 경전이나 신비가 및 철학자들의 글을 재해석했다.오쇼 라즈니쉬 약력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마드햐 플라데쉬에서 쟈이나 교도인 한 소박한 직물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세가 될 때까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1938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인구 2만의 읍인 그라데 와라로 가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1946년, 14세 때 라즈니쉬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명상실험은 깊어져 갔고, 그의 영적 탐구의 강렬함은 그의 육체적 건강을 손상시킬 정도였다. 1952년 3월 21일, 21세의 라즈니쉬는 인간의식의 치고정점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외적 전기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삶의 내적 규율을 갖고서 일체성이라는 무아의 경지에서 살아왔다. 외면적으로는, 사우가 대학교에서 학문을 계속하여 1956년 졸업할 때는 철학 부문의 최고상을 받았다. 그는 인도 토론대회의 우승자이며, 졸업반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7년, 라즈니쉬는 라이퓨어 시의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1년 후 그는 자발퓨어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1966년 그는 현대인에게 명상 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렸다. 1968년, 그는 봄베이에 정착해 살며 가르침을 계속했다. 그는 주로 고원의 피서지에서 정기적으로 명상캠프를 열었다. 그는 거기에서 혁명적인 다이나믹 명상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먼저 카타르스를 시도함으로써 상념의 정지를 돕는 기법이었다. 1970년부터 그는 애정적, 개인적 지도로써 사람들을 자기탐구와 명상으로 들어서는 길인 네오 산히야스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1970년, 라즈니쉬의 명성은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1974년, 그의 깨달음을 기리는 스물 한번째 기념일에, 푸나에서 아쉬람이 열렸다. 그의 영향력의 범위는 이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동시에 그의 건강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0년, 설법중인 라즈니쉬를 암살하려 한 기도가 어떤 전통적인 힌두파의 일원에 의해 일어났다. 동양과 서양의 공적인 종교, 교회들은 그를 반대했지만, 그때까지 라즈니쉬는 전세계에 25만명이 넘는 제자를 갖고 있었다. 1981년 5월 1일, 라즈니쉬는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됨에 따라 육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슴과 가슴의 침묵의 교감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1984년 10월, 라즈니쉬는 자신의 저택에서 소수의 그룹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5년 7월, 그는 라즈니쉬 만디르에서 매일아침 수천명의 구도자들에게 공개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14일, 그의 개인비서와 공동체관리를 담당하던 몇명의 구성원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들에 의해 자행된 모든 비합법적 행위의 유형들이 밝혀졌다. 라즈니쉬는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미 당국자들을 시로 불렀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이 기회를 공동체에 반대하는 싸움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이용했다. 10월 29일 라즈니쉬는 노오스 캐롤라이나 주의 사로트에서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그는 12일 동안 감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는 40만 달러의 벌금을 물 것, 미국을 떠날 것, 5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다. 그래서 인도로 가서 히말라야 산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1985년 12월, 라즈니쉬는 비서와 반려자, 의사는 인도에서 떠날 것을 명령받았고, 그들의 비자는 취소되었다. 그는 네팔의 카트만두로 떠나 그곳에서 강의를 재개했다. 1086년 7월 29일, 라즈니쉬는 인도의 봄베이로 갔다. 그는 그곳의 친구집에서 은둔하며 매일 강의를 계속했다. 1987년 1월 4일, 라즈니쉬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푸나 아쉬람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푸나의 경찰서장은 시의 평화를 어지럽힐 염려가 있는 문제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같은 날 봄베이의 고등재판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8월, 자유세계의 정부들이 사실상 연금상태로 라즈니쉬를 고립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 함께 하기 위해 푸나로 향하곤 했다. 1990년 1월,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인도의 푸나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