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8세기 유럽의 카스트라토들은 전례 없는 기이한 음악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로서 천사로 떠받들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괴물로 손가락질 받기도 했다. 교회의 필요 때문에 시작된 역사적 배경 탓에 원칙적으로 그들은 교회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과 영욕을 함께한 것은 교회음악이 아니라 극음악인 초기 오페라였다. 카스트라토의 몸은 바로크 시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환상과 가장(假裝)에 대한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기교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갖춘 모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환상과 가장, 기교와 모순적인 매력을 높이 샀던 초기 오페라와 함께 번성했고, 그것들이 의미를 잃기 시작한 낭만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p.9
벨칸토의 종언. 그것은 곧 카스트라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스트라토의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관한 전문가들의 논쟁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간에, 이러한 바로크 음악의 새로운 유행 덕분에 현대인들이 우리와 ‘거의’ 다름없었던 이들 가수들에 대한 새로운 지적 발견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230여 여년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포함한 약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놀라운 목소리와 개성으로 극음악과 교회음악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의 뒤를 되밟아 보는 것은 분명 흥미진진한 지적 체험이 될 것이다.--- p.13
이리하여 카스트라토는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 동시대인들은 그들의 양성적인 목소리를 장엄하면서도 관능적이라고 느꼈다. 또한 당시의 대중은 오늘날에 비해서 기교에 대해 훨씬 열광적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간극을 메워 주는 카스트라토의 목소리와 그들이 선보인 초절기교는 끊임없이 “천사 같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묘사되곤 했다.--- p.31
사실 부모들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은 위대한 카스트라토들의 성공에 넋을 잃었고 거세를 묵인하고 암묵적으로 권장하기까지 한 교회의 권위에 압도당했다. 일상적인 빈곤에 시달리던 부모들에게 아들을 거세시키는 것은 그들을 보잘것없는 삶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수술이 성공해서 아들이 훌륭한 가수가 된다면 당연히 부와 명예도 뒤따를 것이었다. 또 그렇게 된다면 그들 자신 역시 성공한 아들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p.39
일반적으로는 6년, 드물게는 10년에 이르는 긴 수련기간 동안, 어린 카스트라토들은 날마다 매우 힘든 훈련과정을 소화해 내야 했다. 성공적으로 공부를 마친 카스트라토들이 선보인 완벽한 수준의 기교는 이처럼 오랜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점적으로 단련한 것은 호흡기법이었다. 훈련을 통해 그들은 들숨과 날숨을 제어하는 근육을 최대한으로 발달시켰으며, 점차적으로 유년기의 초보적 수준의 복식호흡을 버리고 늑골을 활용한 깊은 복식호흡을 완벽히 익혀서 균질하고 유연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호흡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그들은 반복되는 트릴, 파사지오, 메사 디 보체, 마르텔라토, 고르게지오, 모르덴테, 아포지아투라 등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완벽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바로크 시대의 여러 기교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었다.--- p.78
아리아가 한 곡 끝나거나 막이 내려질 때면 이탈리아인들은 대단히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있는 힘껏 박수갈채를 보내고, 카스트라토에게 환호성과 함께 경의를 담은 시구를 적은 종이를 던지거나 프리마 돈나에게 꽃이나 그녀를 찬양하는 짧은 소네트를 바쳤다. 그러고는 아리아 한 곡이나 한 장면 전체의 앙코르 공연이 있을 때까지 결코 잠잠해지지 않았다. 마침내 앙코르 공연까지 포함해 대단원의 막이 내리고 관객들이 빠져나간 1층 입석은 각종 쓰레기가 폐허처럼 쌓여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아무튼 이제는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흔히 식사도 극장 건물 안에서 해결했고 결국 그러다 보면 아주 밤늦은 시각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pp.110-111
그림(Grimm) 남작은 성 루이의 날에 루브르에서 카파렐리의 노래를 듣고 문자 그대로 도취되었다. “이 가수가 눈앞에 펼쳐 보인 완벽한 예술 세계를 말로 정확히 옮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천사 같은 목소리와 상황에 맞는 연기는 실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으며 여기에 능란한 기교와 놀라운 섬세함을 겸비하여 음악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들의 이성과 감성조차도 저항하기 힘들 만큼 압도적이었다. 집중력이라곤 전혀 없던 관객들이었건만 예배당에는 한 마디 수군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진지한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p.127
교회는 거세라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항상 다소 혼란스럽고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교회는 한편으로 이런 신체절단 행위를 강력히 단죄하고 그것을 행한 자들을 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줄곧 카스트라토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했고 심지어 세속사회에서 그들이 자취를 감춘 20세기 초까지도 그들을 고용하여 그때까지 남아 있던 카스트라토들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실제로 교회는 각지의 수많은 성가대 학교를 통해 소프라니스트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노래라는 이유로 카스트라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p.168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믿는다면 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카스트라토에 빠져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단지 카스트라토가 가진 혼란스럽고 미묘한 ‘아름다움’에만 끌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카스트라토라는 그 ‘존재 자체’에 매혹당하고 있었다. 이 매혹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지 서커스를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듯이 일찍이 보지 못한 신기한 대상에 호기심을 느낀 것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임신의 위험 없이 성적 일탈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딱 맞춤인 대상을 찾은 기쁨이었을까? 혹은 그들의 목소리가 가진 예외적인 힘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환상적인 쾌락을 선사한 나머지 그저 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양성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으면서도 또한 양성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철학적 차원의 이상화 내지 숭배였는지도 모른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객 각자가 무슨 내적 동기로 카스트라토에 끌렸으며 어떤 외적 관계를 가졌는지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튼 카스트라토가 거의 유럽 전역에서 여성들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p.187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거세 수술이 행해지지 않은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도 카스트라토들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이탈리아 못지않은 큰 인기와 사랑을 얻었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오페라 세리아의 대유행이 미친 영향이었으나, 카스트라토의 매력에 흠뻑 빠진 일부 군주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작센의 선제후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인데, 보다시피 이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다.--- pp.239-240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카스트라토들, 특히 거세 수술이 시원찮은 결과만을 가져와 평생을 벽지에 내몰려 외롭게 살아온 대다수 무명 카스트라토들에게, 그나마 갖고 있던 일자리에서도 물러난 뒤의 삶이란 한층 더 쓸쓸하고 우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카스트라토가 이 말년의 ‘공허함’에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심지어 그렇게 큰 인기를 누렸으며 말년에도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 속에 살았던 파리넬리조차도 여기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화려했던 무대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유명 가수들은 그나마 고독을 달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어린 학생들을 받아 가르치거나, 예전의 유명세 덕분으로 여러 귀족 및 상류사회 저명인사의 방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토록 어떤 부와 명예도 누리지 못했고 성공한 카스트라토로서 높은 수준의 예술적 성취의 자족감도 느낄 수 없었던 많은 버림받은 고자의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p.280
18세기 말부터 카스트라토들은 출구를 잃어버렸다. 1800년 이후에도 소수의 유명 카스트라토는 활동을 계속했고 카스트라토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카스트라토라는 존재에 체화되었던 하나의 미적 이상은 이제 분명히 그 생명력이 다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면서 카스트라토들은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각 방면에서 공격받고 있으며 그들이 설 땅이 점점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라져 가는 음악 전통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혹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여전히 많은 소년이 헛된 희망 속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한결 더 가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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