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늘 하루가 개로 시작하여 개판으로 맺어가고 있었다. 개 값 한번 오지게 문 셈 치자고 통 크게 마음먹어 보지만, 생각할수록 맥이 풀려 헛웃음만 매가리 없이 새어나왔다. 제 남편 팔아 한몫 잡으려던 수안의 살집 좋은 얼굴 위로, 충국은 자꾸 다리 한 짝 내어 주고 호강한다는 소리 듣는 최 회장 얼굴이 겹쳐졌다. 오지게 정신 사납게 흘러간 하루도 저물어가고, 벌써 거무스름하게 식어가는 저녁 해가 비스듬히 걸쳐진 용머리 산등을 바라보며, 충국은 선뜻 가늠이 가지 않는 생각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쪽에서 보자면 멀쩡한 다리 한 짝 뺏어가서는, 먹고살 수도, 안 먹고 죽을 수도 없을 만치 감질나게 내주는 보훈금도 개 값인 셈이고, 저쪽에서 보자면 있어도 별 뾰족한 수 없었을 다리 한 짝 제 운수대로 잘라먹고는, 언제 가야 끝날지 모를 보훈금을 꼬박꼬박 내주어야 하는 것도 말 그대로 개 값 물어주는 셈이었다.
---「개 값」에서
“아, 그려 이장은 여즈껏 무암리가 워째 무암리인 줄 증말 몰랐단 말여?”
“무암리가 무암리지, 뭐여.”
“답답허긴……. 무암리는 없을 무, 암 것두 암, 즉 암 것두 내세울 것이 없다 혀서 무암리 아니여?”
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지만 달리 반박할 입은 없었다.
“그러게 내세울 거시라군 암 것두 웂는 마을에서, 뭘 가지구서 매끈거리기가 챙기름 바른 미꾸리보덤 더 헌 도시것덜을 꾀어 들인단 말여?”
“꾀긴 뭘 꾀여? 즈덜이 찾아오는 게지.”
그것도 돈 버는 방법이라고 말석 씨는 빙글거리기만 할 뿐 말을 아꼈다. 곁에서 턱을 괴고 있던 춘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러잖어두 유심히 봤는디, 시상에 그 좋은 벌이가 없드라구유. 안 쓰는 구들방 멫 개 새로 도배혀서, 즌기도 안 늫은 방에 가둬 놓구선, 허는 거라군 호롱불에 땅강아지 날아드는 거나 귀경허는디, 암 것두 않구 십만 원씩 척척 내놓고 가니. 요즘 그런 벌이가 어딨겄슈?”
“암 것두 않다니?”
“암유. 내가 메칠을 지켜 봤는디, 어듸 허다못해 마당에 가마니 깔구 널을 뛰기나 허나, 개울을 뒤져 송사리를 뜨기를 허나…….”
“겨울이믄 장작불 때서 뜨뜻한 구들방에 왼몸이 노곤노곤허게 지짐질허지, 생전 해 보지 못헌 아궁이에 불을 때 보구, 쇠죽 퍼다가 외양간에 여물도 줘 보구, 여름이믄 마른 쑥 베어다가 저녁이면 멍석 깔구 모깃불 피워 놓구, 눈두덩이 진무르두룩 켜댄 즌깃불 끄구서, 최롱최롱헌 별덜이 무지륵히 똥덜얼 싸대는 것두 바래보구, 새벽이믄 우물물에 쌀 일어다가 가마솥에 감자 얹은 햅쌀밥두 지어 먹구……. 좀 좋아?”
“근디 불 때구, 밥 짓구, 여물 주는 걸 뉘가 허는디?”
“긔거야 다 즈덜이 하는 거지. 그 맛에 놀러 오는 거신디.”
“뭐여? 그럼, 내 돈 내구 죽두룩 밥 짓구, 불 때구 머슴 노릇허다 가는 거여? 그럼 거기는 뭘 혀?”
“내? 나야 낭구허러 갈 데 일러 주고, 지게 내어 주고, 장작 팰 도끼 끄내 주구, 혼자 허자믄 것두 바쁜 일여.”
안차 빠진 이장도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입 가벼운 광오도 한참을 할 말을 잃고 헛입만 자꾸 벙긋거렸다.
“찬거리두 대 줘야 혀. 설 사람덜은 입맛두 별나데. 겨우내 파먹다 군내가 나서 덮어둔 묵은지에 아주 머리를 빠뜨린대니께. 국을 끓여두 뒤뜰에 십 년은 넘게 묵힌 조선간장을 늫구, 거기 멫 년 동안 빠져서 입만 대두 진저리가 나는 무장아찌며, 고추 삭힌 걸 사죽을 못 쓰구 먹더래니깐.”
이장이 더 못 듣겠다는 얼굴로 허공에 두 손을 허우적거리자, 말석 씨는 몇 톨 남지 않은 땅콩을 기어이 찾아내어 입 안에 털어 넣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근디 그 간장독 뚜껑이 깨져서, 눈 녹은 물, 비 내린 물 죄 들어간 거신디 말여……. 긔 별민가벼.”
“아, 그만혀. 그게 어듸 도둑이지 장사여?”
“무신 소리여? 이장이란 이가 이렇게 시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니, 무암리 좁다란 길이 여즈껏 저 모양인 거여. 진짜 도둑 야그를 해 줄 테니, 들어 볼텨? 서울 근처에 가믄 사람 드믄 산속에 금식원이란 거시 있어. 왼종일 밥 굶기구 몰래 주전부리라두 사 먹다 들키믄 벌금 빼앗구 내쫓는 딘디, 일주일이구 열흘이구 생짜루 사람 굶기구두 멫 십만 원썩 받아 처먹어. 꼴에 공정하니 셈을 헌다구 만일에 살이 안 빠지믄 받은 돈을 도루 내준다는디, 워떤 인간이 일주일썩 굶는디 살이 안 빠져?”
그 대목에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좁은 길을 이유로 면민체육대회 때 선수들이 입을 츄리닝 값이라도 찬조로 뜯어낼 요량이던 이장네들은 난데없는 말석 씨의 돈 버는 이야기에 넋을 빼앗긴 채 그날 모인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내는 우리 마을의 유래를 파는 거시여. 볼거리래믄 즤 마누라 속곳꺼정 벳겨다 파는 시상에, 암 것두 내세울 것이 웂는 마을이 워디 흔허기는 혀? 암 것두 웂는 게 있는 거여.”
---「없을 무, 암 것두 암」에서
“워떠케 알구 오셨슈?”
“워떠케나 마나, 되련님은 인제 워쩔 거유?”
“뭣을유?”
“뭣을 찾을 때가 아녀여, 시방. 안주인이 보따릴 쌌는디, 뭣을만 찾구 있을 때유?”
평식은 망치로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믿기지 않아 재차 묻고서야 안젤라가 보따리를 싸서 달아났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평식은 신발도 안 벗은 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방 장롱에 넣어 두었던 낙찰계 탄 돈부터 뒤져 보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행이라 여겨 긴 숨을 내쉬고는 평식은 뒤미처 제가 아는 패물들을 뒤져 보았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제 결혼 시계며, 4H 일심회원들이 결혼 기념으로 해 준 닷 돈짜리 금도야지도 그대로 있었다. 집안을 이리저리 뒤지던 평식은 안젤라가 쓰던 경대 위에 얹힌 편지 한 장과 결혼식 때 끼워준 이부 다이아 반지가 주인을 잃고 동그마니 놓여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면사무소에서 일주일마다 두 번씩 배운 서툰 한글로 적힌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이 수루를 때리는 걸 보고 무서워요. 우리나라 사람보고 새끼야 해서 나빠요. 당신 새끼야 하면 화난 거처럼 우리나라 사람도 화나요. 그리고 카드 하지 말아요. 내가 신고했어요. 착하게 살아요. 멀리 가니까 찾지 말아요.”
---「새끼야 슈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