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으로 시작되었지만, 희망으로 끝을 맺은 하루. 포장지에 싸인 채, 상자 안에 숨겨져 있던, 까맣게 잊힌 옷들과 고장 난 재봉틀, 그리고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다락방의 삭아가는 거미줄들 사이에서 발견한 희망.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하지만 지금은 레몬으로 세탁한 리넨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햇살처럼 내 존재를 환하게 비추는 희망. 희망, 이것 없이 나는 어떻게 살아온 걸까?
--- p.8
나는 눈을 굴린 채, 그의 손에 들린 상자를 건네받으며 뜻밖의 무게감을 느꼈다. 그러고는 구겨진 포장지를 꺼내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종이들이 서로 겹겹이 쌓여있었다. 오래된 것들인지 모두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고, 귀퉁이에 색이 칠해져 있었다. 언뜻 보이는 글씨로 보아 어떤 종류의 편지나 서류들인 듯했다.
--- p.40
잠시 후, 나는 앞에 놓인 정보를 토대로 대략적인 타임라인을 형성할 수 있었다. 연락이 시작된 것은 2003년 6월로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9년 말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다 2013년에 편지 한 통이 더 도착하고 나서는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왜 끊긴 것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그 이유에 대한 상상을 거부하고 대신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 p.115
“아니, 몰라. 그를 찾는 건 내가 도와줄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눈 게 벌써 여러 해 전이야. 아마도…… 2008년쯤인가, 그랬을 거야. 그는 더블린에 있었고, 다른 장소들을 언급하기도 했어. 근데 뭔가 느낌이 달랐어. 더 경계심이 강해졌고, 마치 이곳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하는 것 같았어. 난 메시지를 남겼었고, 그가 실제로 전화도 했었어. 왜냐하면…… 내가 너에 관한 말을 했기 때문이었어.”
--- p.181
나는 편지 봉투를 손에 든 채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잠을 자던 작은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가 떠난 다음, 아마도 이 침대는 제이미나 그의 친구, 혹은 다양한 방문객들을 맞이하며, 침대 시트 역시 수십 번 이상 세탁되었을 것이다. 조는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가 머물렀던 침대에 누워 시원한 면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베개 위에 그의 편지를 올려두었다. 창문의 블라인드는 달빛이 뿌리는 은색 페인트를 향해 열려 있었다. 나는 여기 이곳에 그와 함께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나는 그 상상 속 존재에 매달리며, 언젠가 그것이 현실이 되기를, 내가 또 다른 기적을 발견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
--- p.285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상상할 수 없다. 그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도, 그가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을 느낄지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도 변했고, 그 역시 변했을 것이다.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각자 다른 사람이 되어 우리가 다시 서로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는 사랑, 경험, 상실 등 많은 것들로 결속되어 있었다. 눈 녹듯, 그 모든 유대가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 p.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