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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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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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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10g | 120*200*20mm
ISBN13 9791198165015
ISBN10 119816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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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달랑 이 상자만 남았다. 아버지의 유골은 어쨌든 자기 자리를 찾았지만, 이 물건은 갈 데가 없었다. 상자는 내 것이 아니면서도 내 것이었고, 내 집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니면서도 내 집에 있었다. 20년 넘게 나는 과거의 짐으로부터, 이 골칫거리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상자와 그 속의 이야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언젠가는 그것과 직접 대면해야 했다. 그건 곧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여전히 망설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 세상에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온갖 재앙이 밖으로 빠져나올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에서 고대 신화에 의지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신을 믿는 건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인 짓이므로.
---「이야기의 시작」중에서

우리 식구들은 집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집은 우리의 불행을 숨기는 곳이었다. 우리 집은 안전하지 않았고, 매달 말이면 재앙이 닥쳤다. 우편함은 지옥을 여는 문이었다. 안부를 묻거나 명절 인사를 하는 편지는 단 한 차례도 없었고, 온통 독촉장뿐이었다. 그 착실하고 믿음직스럽고 출세욕이 강한 삼촌이나 고모는 이런 삶을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들보다 가난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삶에 더 가까운 것은 우리였다. 물론 죽음에도 더 가까웠다. 그들보다 먼저 죽게 될 테니까.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고, 가족이 될 수도 없었다. 가족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저 밑바닥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
---「누가 나의 가족인가?」중에서

요즈음 크렘린에서 한 파시스트가 미쳐 날뛰며 이웃 나라를 죽음과 파괴로 뒤덮고 수백만 명을 기아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는 그런 자를 이번에 처음 본 게 아니고, 혹자는 그 속에서 체계성을 찾는다. 하지만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 파시스트가 체계적인 필연성의 산물이라고 믿지 않는다. 당시엔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로 이끈 것은 인간의 결정이었지 자연법칙이 아니었다. 우리가 처한 세상은 인간적 선택의 결과다. 만일 우리가 그런 개인적 결정을 토대로 사회적 결정을 내린다면 더 나은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종의 기원」중에서

항적운이라는 이름에서는 그로 인한 환경적 재앙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환경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재앙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항적운은 항공 여행 때문에 생기고, 항공은 지구 온난화의 가시적 신호다. 그런 의미에서 항적운은 인간에 의한 대기 훼손을 뜻하고, 환경 파괴와 그 여파를 고려한다면 항적운에는 당연히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한다. 한편 항적운은 인공 구름이고 이는 개념으로서 다시 과거를 가리킨다. 미래와 그 여파를 감안하면 항적운에는 불행을 감지한 이름이 붙어야 맞는다. 고통과 아름다움의 이름이 아니라. 이런 이름에 어울리는 구름은 따로 있다. 이를테면 하늘에서 환하게 빛나는 흰 구름이라든가 석양빛에 물든 일몰의 구름이 그렇다.
---「이름 사용법」중에서

석유는 쓰레기다. 게다가 상속인 없는 상속이자, 우리 문명을 질식의 위험에 빠뜨리고 마침내 새로운 법을 필요로 할 주인 없는 재화다. 새 법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사유재산과 상속, 가족에 관한 기존의 법률이 우리가 사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문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 것은 그 법들이다.
---「쓰레기에 관한 고찰」중에서

구름과 비, 바람은 누구의 것인가? 날씨는 매일 다를 수 있지만 기후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공기는 수동적 자원이자, 사실상 사유재산이자, 산업 사회의 온갖 쓰레기를 태워서 배출하는 쓰레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예는 충분하다.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것들을 개발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소비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다. 정의를 위해서다. 어떻게 해야 더 공정한 세상에서 일하고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우리 사회는 전례 없는 규모로 부를 창출하고, 전례 없는 규모로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둘 다 좀 더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불공정은 결국 모두의 안전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깨달아야 한다.
---「상속자들을 생각하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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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상자』는 현대 상속법을 통해 우리가 가진 것의 변화와 우리가 가질 것의 변화를 독창적으로 독촉한다. 가족이라는 이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상속에 대한 상상력을 변형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거부하는 데에 필연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 저자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상자’ 속에는 오로지 아버지가 남긴 빚의 흔적뿐이지만, 그가 진정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는 그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소유와 분배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촉구하는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을 물려받을 수 있고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지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 시대의 변화는 성공이 몰락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것은 세계관의 변화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기원에 대한 매력적인 혁명서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예언서와도 같은 이 책이 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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