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만한 칼잡이올시다, 나는 외로운 칼잡이올시다, 나는 오늘도 나를 향해 칼을 겨누고 꼿꼿이 선 채 죽어가는데, 세상은 나를 날마다 바루더이다, 바람처럼 바루더이다, 비처럼 적시더이다, 혹여 내가 이대로 나에게 진다 해도, 바람이나 비를 원망하지 않으리다. 다만 그대가 어느 길목에 서서, 바람도 바라보고, 비도 바라보고, 나도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외다. 작품으로 『한련화』 『나도 이제 그 이름을 알겠어』『살아가는 동안 사랑만이라도 해봐』 등이 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괜한 설움에 또 눈물이 났다. 울지 말아야지. 나도 아픈데. 나도 아파 죽겠는데. 그 남자 때문에 내가 울어야 하는 게 너무 서글프다. 그러니까 울지 말자. 밥 먹을래. 난 이런 여자 아냐. 밥 실컷 먹고 씩씩하게 공부도 하고 사교도 해야지. 난 이런 여자 절대 아냐. 세상이 다 알아. 윤심덕이 어떤 여자인지. (본문 중에서)
벽난로 안에서는 당신의 원고들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지요. 당신의 두 눈은 불빛에 반짝이고, 당신의 굳게 다문 입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닫혀져 있었지만, 나는 그때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야금야금 불사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토록 쓰고 싶어 하던 당신의 글이고, 그토록 인생을 다 팽개칠 만큼 소중한 당신의 꿈이라는 것을. 그렇지요? 당신이 불에 던져 넣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당신의 영혼이었지요? 아. 그리고 알아버렸답니다. 원고를 집어넣고 있는 당신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 우리의 사랑도 저물어간다는 걸 깨달았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처럼 사랑도 때가 되면 이렇게 끝이 난다는 걸. 하지만, 난 당신과의 사랑을 끝낼 마음은 없었어요. 다만, 당신에게 다시 영혼이 불어넣어지기를 바랐지요. 사랑은 함께 머물러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당신 때문에 이미 오래 전에 알아버린 걸요. 전 그랬어요. 아. 지금도 당신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당신에게 언젠가는 당신이 읽을 편지를 써두는 순간에도 전 행복해요.(본문 중에서)
"난 당신처럼 가난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어려서부터 갖은 꾀를 다 동원해서 내가 가난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 쳤죠. 남들 앞에서 분칠을 하고 난 멋진 인생을 산다고 허세를 부렸어요." 심덕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쿡쿡 웃었다. "사실은 구멍 난 스타킹 하나 새로 살 돈도 없는 주제에 음악회 특석에 앉아서 바이올린 이야기나 하면서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달라." "뭐가 다를까요?" "당신은 나보다 유명한 사람이야." "내 가면을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냥 구경하는 게 아니죠. 발톱을 갈면서 할퀼 준비를 하고 구경하는 거죠. 언제고 내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릴 때가 되면 할퀴고 물어뜯으려고 호시탐탐……" "당신……" 우진은 심덕의 손을 잡았다. 심덕이 담배를 피우면서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이 다른 한손을 심덕의 뺨에 가져다 댔다. "아프구나." 우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병이 든 거야.” (본문 중에서)
나란히 앉아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눈보라 속으로 나서던?그 날에 당신이 내게?건넨 초판본 개벽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도 내가 건넨 음악회 기념 티켓을 잊어버렸기 바래요. 공평하게. 사랑이라는 건 보상금이 걸려있지도 않고 기쁨도 슬픔도 온전하지 않으니까 시작하지 않았을 때가 더 좋았지요. 아주 짧았던 시간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다면 너무 많이 손해가 난거랍니다. 그냥 지나치세요. 나처럼.? 언제쯤 .언제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머나멀게만 느껴지다가 편지 몇 통으로 살아내고 있구나 생각만 하다가?또 언제쯤. 언제쯤. 서로 많이 초라해지잖아요. 오래된 사진을 늘어놓고 가슴 쓰리게 바라보다?문득 창밖으로 고개 돌리면 무심한 빗소리마저도.? 이제 기억나지 않지요.?눈보라치던 역사의 철로. 작고?낡은 차창 밖으로?스쳐 지나던 강가의 노란색 불빛들. 이제는 다 잊으셨겠지요. 고마워요.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문득 돌아보면 사랑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말해줘요. 누구에게든.? 미안합니다. 잊어버렸어요. 당신의 이름을. 나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