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엔은 같은 해인 1945년에 사실상 나란히 출범했다. 한국은 비록 그해 광복과 동시에 주권 국가를 출범시키지는 못했으나, 이때부터 유엔과 숙명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DNA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유엔 헌장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민주 독립 국가, 인도주의, 인권, 국제 평화 같은 키워드가 포함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은 유엔이 지향하는 가치와 규범을 적극 수용하며 주권 국가로서의 첫 걸음을 떼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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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정부 수립 직후부터 거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유엔과의 협력에 전력투구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이러한 결정이 정치 지도자의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대다수 한국민들의 정서에 따른 것인지는 더 규명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연한 사실은 한국이 주권 국가로 공식 출범하는 과정에서부터 유엔과 DNA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고, 한국 정부도 출범 직후부터 유엔 산하 기관에 적극 가입하는 정책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며 한국 구하기에 나선 유엔의 선택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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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과 구소련 간의 한반도 관리 방안에 대한 협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상정하면서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이었다. UNTCOK는 1947년 11월 14일 2차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10 총선거의 공정한 감시 및 관리와 민주적 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기구로서, 1947년부터 1948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UNTCOK는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UNCOK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기까지 정부 수립과 한국 전쟁, 전후 복구 시기 등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이끄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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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의 수립으로 UNTCOK의 임무는 종결되고, 이제 유엔한국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 UNCOK이 그 뒤를 이어 받게 되었다. 이로써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의 임무는 한국 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군의 철수를 감시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UNCOK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22개월 동안 남북한 갈등과 대치 국면을 관리하는 유엔의 위기관리 체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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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UNC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유엔 간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실체로 기억된다. 그들은 한국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국을 구했을 뿐 아니라 전후 과정에서도 존폐의 위기를 극복해오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UNC는 한국의 명운과 결부되어온 실체라는 것이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유엔의 역사에서 UNC가 유일무이한 유엔 상비군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한반도 문제가 유엔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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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사령부 예하 기관으로 창설된 유엔한국민사지원사령부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UNCACK는 전쟁의 폐허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비록 군사 조직의 성격으로 운용되긴 했으나, 여기에 참여한 인적 구성을 보면 국제기구에서 파견된 민간 전문 인력들이 다수 참여하는 ‘민·군 융합 조직’이었다. UNCACK는 한국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식주 제공에서부터 질병 예방과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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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차원의 난민 기구가 한국에서 행한 인도적 지원 역할은 상대적으로 보조적인 수준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전쟁 시기에 이루어진 IRO의 협력과 그 속에 내포된 인도주의 정신은 전후 한국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인도적 지원에 관심을 갖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UNHCR은 설립 초기 규정에 의해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못하였지만, 1970년대 말 이후 한국이 난민 문제 지원과 같은 인도주의적 사업을 실시하면서 필요한 이론적·조직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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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경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해 북진에 나선 유엔군은 당시 미군을 필두로 전쟁의 조기 종료와 한반도 내 통일 국가 건설을 계획하고 한반도 전체의 재건을 담당할 기구 창설에 대한 구상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0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는 호주와 미국 대표단이 공동으로 제출한 결의안 초안을 기반으로 한국 구호 활동을 위한 조직 구성에 착수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안건에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창설에 대한 구상이 최초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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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의 경제를 구제하고 재건한다는 명목하에 한국 전쟁 도중 설립된 유엔한국통일재건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UNCURK는 1973년 11월 28일 해체되기까지 만 23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그 창설 목적대로 “통일되고 독립한 민주 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UNCURK는 북한 측의 거부와 비협조로 끝내 본래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UNCURK는 한국이 유엔이 인정하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외교적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세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있어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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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직전 한국은 UNESCO에 가입하여 전쟁 기간과 전후 재건 및 복구 기간에 다양한 교육 지원의 수혜를 받았다. 유엔과 UNESCO는 한국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신생 독립국들과 개발 도상국들에 대해서도 교육 원조를 시행했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성공은 쉽지 않았다. 당시 UNESCO가 우리에게 준 것은 배움을 이어갈 책과 미래를 바꿀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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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 중에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선 국가들은 파병 16개국, 구호물자와 의료 지원에 나선 45개국을 합쳐 총 60여 개국에 달했다. 유엔 산하 기구 9개 단체와 미국, 영국 등에 소재한 수많은 NGO들도 지원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글로벌 연대’가 형성된 것이며, 이를 주도한 것이 유엔이었다.
--- p.379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역할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언젠가 한국민들의 숙원인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고, 통일 국가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는 과정에서 유엔이 선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남북한 모두가 유엔 회원국이 된 이상, 통일 과정에서 유엔의 참여를 거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유엔이 한반도에서 수행한 역할을 되짚어 보고, 이를 토대로 한반도의 미래 비전을 탐색하는 과업이 앞으로 더 크게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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