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들은 과연 로마인을 기억해줄까요. 기억될 만한 가치가 로마인한테도 조금은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로마인의 천분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오만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인의 부지런함, 로마인의 열성, 로마인의 명예심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런 덕목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게 인생이지만, 그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빛나는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도 최소한 무명이나 망각에서 구원받을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요.
--- pp.172-173
후세는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서기 96년부터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를 거쳐 서기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할 때까지를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게 되지만, 동시대의 로마인들은 '황금시대'라고 부렀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황금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하다고 평가한 세황제에게는 각각 다음과 같은 수식어구를 바쳤다. 황제의 이름이 책의 제목이라면, 이 수식어구는 부제 같은 느낌을 준다. 트라야누스- '지고의 황제' 하드리아누스-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안토니누스 피우스-'질서있는 평온'
--- p.423
황제란 공복 중의 공복이라고 믿은 안토니누스인 만큼, 무엇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서도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은 선대의 두 황제가 거의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어떻게 하느냐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안토니누스에 따르면 일은 철저하고 명쾌하고 간략하게 해야 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연고나 정실로 친지나 친구들을 등용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친구나 친지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했고, 그래서 상대들도 지나치게 황제에게 의존해서는 안되었다.
--- p.439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면, 대개는 측근을 비롯한 협력자를 교체한다.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본국 이탈리아에 상주해 있는 유일한 군사력인 근위대 대장에는 황제의 심복을 임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자리도 교체하지 않았으니까, 하드리아누스의 인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이 정도면 정말 철저하다.근위대장은 그 후에도 무려 20년 동안이나 자리를 유지했고, 이제 그만 은퇴하고 싶다고 자청한 뒤에야 겨우 안토니누스가 고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인사는 철저한 적재적소 위주였고, 게다가 그것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안토니누스에게도 나름대로 인간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맡기면 그 일을 잘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름의 생각을 관철한다는 점에서는 안토니누스도 상당한 고집쟁이였다.
하루는 아내인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인색함을 불평했다.그러자 황제는 이런 말로 아내를 나무랐다. '당신도 참 어리석군. 제국의 주인이 된 지금은 전에 가졌던 것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오.' 어쨌든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다. '국가 소유로 돌려야 할 재산을 필요하지도 않은데 소비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다.
--- p.427,8
'진심으로 성실하게 황제의 책무를 수행한 것이 20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린 트라야누스였다'
'1800년 뒤의 한 연구자는 하드리아누스를 이렇게 평했다.'속주민들이 로마로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친히 속주를 돌아다니며 속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평가야 말로 하드리아누스의 묘비명에 가장 어울리는 찬사가 아니었을까.'
'같은 로마 황제지만, 투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통치자로서 치세를 맞쳤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버지 역할로 일관했다.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가 묘사한 안토니누스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이 아닌가.'
--- p.210. ---p. 420. ---p.453.
오늘날 '황제들의 포룸'이라고 불리는 이 일대가 포로 로마노와 함께 제국 통치의 중추적 기능을 맡게 된 것은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확장 공사를 한 뒤였다. 공화정 시대에 국가의 중추기관은 아이밀리우스 회당과 원로원을 북쪽 가장자리로 하는 포로 로마노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우선 원로원 회의장을 재건한다. 그리고 그 북쪽에 '카이사르 포롬'을 지었다. 원로원과 아이밀리우스 회당 사이의 길은 수부라라고 불린 서민층 주거지역과도 통해 있었다.
라틴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언어로는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는 '포룸'이라는 명칭을 사전에서는 "고대 로마의 도시 한복판에 있었던 대광장으로, 정치. 경제. 사법의 중심이며, 상거래나 재판이나 민회에도 이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공공광장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뜻을 확대하여 단순한 대화의 마당도 '포룸'이라고 부른다. 위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포로 로마노에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원로원 회의장(쿠리아), 재판과 상거래에 이용되는 회당(바실리카), 지하에 국고가 보관되어 있었던 신전(템플룸), 집회를 위한 연단(로스트룸), 그리고 장식품 역할도 맡고 있는 개선문이나 승전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시민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모이는 장소였다.
카이사르가 창안했고 따라서 로마의 독자적 건축양식이 된 '포룸'은 포로 로마노가 갖고 있던 이런 기능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이었다. 기본형은 직사각형이다. 한쪽 변에는 신전이 놓이고, 지붕을 씌우고 이중으로 기둥을 세운 회랑이 나머지 세 변을 둘러싼다. 회랑 안쪽에는 상거래를 위한 사무실이나 점포들이 늘어선다. 학원 형태의 학교로 이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전과 회랑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광장이고, 광장 한복판에는 이 포룸을 만든 사람의 기마상이 세워진다. 신전 앞 계단은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하는 연단이 되기도 한다.
--- p.140-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