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란 과거를 상상 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으로서 현재나 가까운 미래를 비난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 옳지 않은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더 나은 삶을 누렸던 시간을 찾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환상이다. 즉 과거의 모습에 대한 현재의 잘못된 점에 대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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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펼쳐놓은 장기는 무승부 장기인데,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다. 일반적으로 무승부는 판단해낼 수 있는 것이지만 국면이 최대한 단순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본래 인간이 비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가 벌여놓은 무승부 장기를 인간이 가볍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은 하느님의 장기가 무승부 장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비로소 끊임없이 장기를 두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고의로 인간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그도 또한 부득이한 것이다. 인간을 위해 벌여놓은 무승부 장기판이 인간을 위해 영원한 놀이거리를 제공함으로써 하느님의 인자함이 진정으로 체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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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민족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의 시작이란 사람들이 시간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또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또는 바람의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시간의 운영자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한순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순간을 일컫는다.
대다수의 신화가 갖고 있는 시스템에 따르면 시간의 시작은 경험론적인 역사적 시간에 선행하며 시간의 운용자가 세상을 만드는 동작과 함께 시작된다고 한다. 많은 흐로니스트는 인간이 세상을 묘사할 때 본능적으로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민족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의 시작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 속으로 떨어져 있다. 정교도와 카톨릭이 세계의 나이를 따질 때 발생하는 차이는 8년이나 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흐로니스트가 신뢰도 높은 시간의 시작 시기와 장소를 정의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다. 인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세계의 나이를 받아들이는 데도 다양하게 나나타는 것이다.
다양한 신화에서 시간의 시작은 완벽한 카오스로 묘사되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시작에서 사건의 순차성은 종종 시간의 종말과 반대되는 순차성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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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부터 미래를 해방하는 이미지엣는, 우리의 일상적 존재 방식 속에 현존하는 과거가 마치 화단을 덮은 젖은 담요처럼 미래를 억누르고 있다. 미래로부터 과거를 해방하는 이미지에서는, 기억과 일상의 삶에 부재하는 과거가 마치 진공처럼 과거를 망각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과거는 현존하거나 부재하거나 다 좋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그>에서 보듯이 그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는 오직 그 두 이미지가 병렬될 때뿐이다.
- [시간의 언어] . 루이스 월처 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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