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아들 사랑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세상의 아버지들은 돌봄과 간호를 받기만 하고, 세상의 어머니들은 남편과 자식을 돌보기만 하는 줄 알았었죠. (…) 세상의 아버지들이 아들을 그토록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발을 주물러주고, 대소변을 받아주고, 죽을 떠먹여주고, 한밤중에 꾸벅꾸벅 졸다가도 금세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링거를 올려다보며 아들의 얼굴을 살피고, 아들의 진땀을 닦아주고, 아들을 일으켜 안아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면서 저런 사랑을 받고 그냥 주저앉을 아들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p.18~21
입원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곳에 적응하기 위해, 또는 아픈 상황을 잊기 위해 자신의 본능을 드러내게 된다. (…) 고독한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다인실이 인간적인 공간이 될 터이다. 그러나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통증을 혼자 조용히 견디고 싶은 사람에게는 다인실의 환경이란 어쩌면 몹시 자극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환자란 가장 약자의 처지로 떨어진 존재, 어쩔 수 없이 입원실의 그 무차별한 상황을 견뎌야 한다. --- p.25~26
나는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고 주사를 놓고 다시 소매를 잘 내려주며 팔을 주무르듯 꼬옥 잡아드렸습니다. 돌아서려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고맙다고요. 죽어가는 사람, 냄새나고 싫을 텐데, 항상 따뜻하게 잡아주어서 고마웠다고, 잊지 않겠다고요. 나는 눈물을 쏟을 뻔해서 아니라고, 제가 당신을 만나 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자기 갈 길을 정리하고 가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봐도 가슴에 오래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 p.38~39
김은 운동을 열심히 하고 항상 즐겁게 웃고 옆 병상의 환자들도 보살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병동에 있는 환자들도 서로 같은 또래인 데다 같은 병을 앓는 터라 동병상련이 남달랐다. 그래서 한 명이 항암치료를 하는 시기가 되면 나머지 동료들이 그 사람을 극진히 돌보곤 했다. (…) 돌봐주러 올 부모나 형제가 없을 때 그들은 형제 이상으로 서로를 아낌없이 돌봐주곤 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어서 덜 외로웠다. --- p.51~52
미숙아가 건강해지면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 일반 신생아실의 아기 침대로 오게 된다. 신생아실에서 추후 관찰을 하며 며칠 보내게 되는데 그렇게도 더디게 회복되던 아기들이 어느 순간부터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 살이 뿌듯하게 올라서 탱글탱글해진 아기를 받아 안는 엄마.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질 것 같은 그 얼굴.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하지만 눈과 입술과 뺨에 기쁨이 흘러넘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가졌던 소중한 것을 건네주는 기분으로 아기를 엄마의 품에 안겨준다. 우리 역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 p.74
나는 겨우 스물아홉 살의 젊은이가 어쩌다가 이토록 극심한 알코올홀릭이 되어 한 집안의 부끄러움이 되어버렸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 겨우 병원에서 근무하는 하찮은 사람들에게 집안의 치부를 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는 그 표정. 간호사나 응급실 직원에게는 말을 건네지도 않고 간단한 설명을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부부에게서 보았던 것은 자식을 부끄러워하는 모습, 그것이었다. (…) 부모로부터 패배자로 낙인 찍힌 자식.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 마침내 어머니로부터 내쳐진 아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 p.116~117
오랜 세월 그의 보호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보호자가 되어 보냈어야 할 시간을 불과 며칠밖에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 간극이 찰나에 불과했다는 것, 그가 그토록 무심한 자식이었다는 것이 그는 고통스러웠다. (…) 그는 혼자 있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담당 의사를 부르러 나갔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두 사람은 이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곧바로 의사를 부르기는 했지만 사망선고를 하고 차트를 정리하고 천천히 영안실로 옮기도록 했다. 혈육의 손을 잡고 몇 가지 추억 정도는 돌이킬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 p.161~162
죽음으로 자기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려는 자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나는 나의 신념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했다”라고 말하려는 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한 인간이 가장 나약할 때 맞이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미처 준비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죽음 앞에서 가장 나약해지며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게 대부분의 인간이며, 그런 인간을 사람들은 더욱 사랑한다는 것, 더욱 애틋이 여기게 된다는 것은 내 죽음도 그다지 위대하지는 못할 것이며, 바로 그와 같은 과정이 내 죽음에 대한 퇴로를 열어두는 과정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 p.165
아이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해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에게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로 아픔을 덜어줄 사람이 없었다. 좀 어떠니? 많이 아프지는 않니? 하고 물어도 다 큰 사람처럼,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쓸쓸히 입을 떼려다 마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삶의 잔인함을 받아들이는 대신 나는 분노했다. 그 아이를 보고 나오면, 물론 대상은 딱히 없었지만, 괜히 그렇게 화가 났다. 아이가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엄마와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화가 좀 덜 났을까. --- p.170
삶의 마지막은 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삶이 고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에는 비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목격했다. 괴로움은 고통 앞에서는 무력한 것임을. 그리고 나는 알았다. 목숨을 두고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고 흥정도 할 수 있음을. 영혼이란 그동안 내가 견지해온 삶의 줏대 같은 것이나, 목숨을 놓고 흥정을 할 때는 바로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생명에게 신체란 영혼보다 무겁다는 것을. 생명의 본질은 오직 생존에 있고, 생존을 추구하는 생명은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숭고하다는 것을.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