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총도 있나요?'
'그건 모르겠는걸. 하지만 아빠한테 총이 필요하면 루즈벨트 대통령이 언제든지 줄 거야.'
'잘됐어요. 그럼 그 총으로 나쁜 놈들 고추를 쏴버릴 수 있으니까.'
도서관 사서인 에스텔레는 아들의 새로운 어휘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녀 앞에서 아들이 최초로 사용한 '고추'에 대해서도 결코 무심할 수는 없었다.
'누가 고추란 말을 했는데 ?'
되도록이면 태연하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물었다.
'로라가요. 그애 아빠는 의사 선생님이래요. 그런데 그앤 없던요.'
'뭐가 ?'
'로라는 고추가 엇단 말예요. 처음엔 그애 말을 믿을수 없었지만 그애가 모뎌줬어요.'
에스텔레는 잠시 멍했다. 어린 바니를 쳐다보며 이 애는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가까스로 할 뿐이었다.
--- p.17
'아빠 ,정확하게 나는 누구죠?'
어느 날 그는 허셜에게 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벤.'
'우리 학교 애들이 나보고 유태인이래요, 엄마, 아빠가 유태인이라고요. 하지만 어떤 애는 그건 당치도 않은 얘기래요, 검둥이일 뿐이래요.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골치가 아파서 내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살고 싶어요.'
허셜은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지만 명쾌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만 말해 주었다.
'여긴 미국이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어.'
--- p.314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거의 20년간을 의사로서의 훈련을 받아온 뒤에 이제 막 외과의사로서 전도 양양한 미래를 펼치려고 하는 사람이 한 경찰관의 구둣발에 의해 그처럼 오랜 불면의 밤과 땀과 수고로 얼룩진 세월을 모두 무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베넷이 의사로서 가장 고귀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 p.233
놔 날 건드리지마. 의사를 불러줘 내가 의사요 벤넷은 얼굴에 정직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날 놀리는 거야 흑인의사 좋아하네. 돈 줄테니까 의사 불러 동료 인턴 허브 글래스가 자신에게 맡겨진 창상 환자의 처치를 의논하러 그에게로 오자 상황은 아주 심각해졌다. 벤넷이 그와 귀엣말을 나누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리지 환자는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난 저의사를 원해.
--- p.361
'난 언제나 네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어. 내 치부나 결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런 나를 좋아하기는 힘들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난 그런 널 좋아해, 로라.' 바니가 말했다.
'난 널 속속들이 사랑하고 잇어.'
그녀의 고개가 밑으로 수그러졌다. 보지 않고도 바니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봐, 로라. 솔직히 말해줘. 내가 지금 내 고백으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거야?'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봐라보았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두 뺨에 흐르는 눈물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랬길 바래.'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난 언젠 빌어 왔거든. 네가...그러니까...나를 한 여자로 사랑해 주길 말이야.'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식으로 말이야. '
바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제 술이 말짱히 깼어. 로라 넌 어때?'
'나도 말짱해.그리고 내가 말하는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이제 두 사람은 더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바니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방으로 들어갓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우정은 끝이 났다.
--- p.339
끊임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호위는 혼자서 외롭게 죽음과 유사한 삶을 지속하고 있었다. 삶다운 삶을 경험하지 못한 그에겐 죽음다운 죽음도 불가능했다.
--- p.254
간단한 숫자 두개- '26'이었다. 방안은 호기심으로 술렁거렸다. 잠시 그대로 있던 홈스는 숨을 가다듬으며 학생들을 주시했다. '여러분, 이 숫자를 기억해 두십시오. 지구상에는 수천 가지의 질병이 있지만, 의학적으로 치료법이 개발된 것은 스물여섯 개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가 짐작일 뿐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