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비록 비극적인 삶이었다 해도, 루크레치아가 사는 것처럼 산 것은 아버지가 교황에 즉위했을 때부터 오빠 체사레가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뿐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보르자라는 이름과 함께 살았다. 보르자 가문의 영광과 몰락, 그것과 하나로 얽혀서 살았다. 보르자라는 이름이 무너졌을 때, 그녀의 인생도 따라서 끝났다. 그후 그녀는 더 이상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아니었다. 착하고 상냥한 아내 루크레치아 데스테일 뿐이었다.
--- p.167
칼로 위협당한 아이들은 울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카테리나가 성벽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맨발에 머리도 묶지 않고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오르시는 성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여기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모든 역사가가 후세에 전한 그 유명한 말이다. 카테리나는 유유히 치마자락을 홱 걷어올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멍청한 놈들아. 이것만 있으면 아이쯤은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단 말이다.'
--- p.216,---pp.19-p. 217,---pp.2,---카테리나 스포르차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 즉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갈등이라는 혼탁하고 달콤한 관계는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를 나누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인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 북방의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였고, 사보나롤라(이탈리아의 종교 개혁가,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와 속세의 도덕적 부패를 공격했으며, 한때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 피렌체의 독재자가 되었으나, 교황청 및 메디치 가문과 대립한 끝에 실각하여 처형당했다)가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거나 당시 교황들이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p.63
오늘날에는 남성적 심성을 가진 여자에 대한 평가가 몹시 가혹하다. 대담하고 용감한 여자는 여걸이나 여장부로 불리지만, 그 말투에는 은근한 경멸이 담겨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런 말조차도 결코 경멸을 내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찬탄하는 말이었다. 카테리나는 '이탈리아의 여걸'(라 비라고 디탈리아)로 불렸다. 아름답고 잔인한 여자, 대담하고 드센 여자는 그 당시 남자들의 눈에는 남성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 p.182
여자들 중에는 어떤 고통이나 비애를 겪어도 그것이 조금도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사람이있다. 애써 그것을 극복하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과 비애를 가슴 속에 담아 두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나 비애는 저절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들한테서 떠나간다.
마치 운명의 여신이 그녀들한테는 평소의 전의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이런 여자는 가장 행복한 여자다.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여자이기도 하다.아솔로 시절의 카테리나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우아하고 쾌활한 부인이 키프로스 여왕으로 있던 15년동안 온갖 음모와 반란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아온 바로 그 여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 p.347
교황성하의 자비로움으로 제 가난한 마음에 정신의 보석을 주십시오. 그리고 뒤에 남겨두고 가야 할 제 남편과 아이들에게 신의 가호와 함께 성하의 너그러운 자애를 베풀어주시기를....' 루크레치아가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그렇게 간절히 남편과 아이들을 부탁했는데도. 그로부터 2년도 채 지나기 전에 교황은 페라라에 전쟁포고를 했다. 그녀가 한 일은 또다시 헛수고로 끝난 셈이다.
--- p.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