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애정이 일하는 카페는 점심시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반짝 벌이를 하는 작은 개인 매장이었기에, 퇴근시간이 지나면 거의 손님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같은 불금엔 간간이 테이크아웃을 해 나가는 사람들 외에는 매장에 앉아 머무는 사람도 드물었다.
한산한 틈을 타 바를 정리하는데 연회색 니트에 네이비색 피코트를 입은, 얼굴이 하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희고 보송보송한 피부와, 애교 있는 입술이 인상적인 귀여운 얼굴이었다.
‘올, 귀여운데?’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내 후임이 여기 커피를 키핑해놨다고 하던데.”
‘너구나, 욘석. 이 구역 쓰레기가.’
상냥했던 애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적대감으로 물들자, 눈앞에 선 남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보조개가 생기도록 싱긋 웃더니 얼굴을 매만진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닙니다. 경흠이 선임분 되시나 봐요.”
“네, 경흠이가 내 이야기해요?”
“네, 아주…… 특별한 분이시라고.”
특별하다는 말에는 굉장히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특별히 멋있다, 특별히 소중하다. 그리고 특별히 월등하게 재수 없다. 애석하지만 눈앞에 선 남자의 특별함은 세 번째였다. 남다르게 재수 없다는 평가와는 달리 멀쩡하게 생긴 얼굴이 아쉬웠다. 차라리 세상 둘도 없는 추남이라면 구정물을 먹이는 데 죄책감이 좀 덜할 텐데 말이다.
“아, 연경흠이가 그럴 리 없는데. 특별하게 뒷담을 했나?”
남자가 입술을 끌어당겨 웃으며 예리하게 이야기한다. 애정은 표정을 숨길 수 없어 조금 더듬거린다.
“어, 에티오피아 구지 샤키소로 드릴까요? 매번 그걸 사가던데.”
“그건 낮에 마셨으니까. 케냐로 주세요.”
남자는 커피콩을 한번 슥 훑어보더니 케냐AA가 담긴 원두통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애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원두통 뚜껑을 열어 콩을 덜자, 남자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앉아 계시면 자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내가 커피에 관심이 좀 많아서. 구경 좀 할게요.”
‘아이, 이러시면 곤란하오만.’
애정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련의 행동들을 꼼꼼하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애정은 경흠이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을 때부터 미리 준비해둔 행주 빤 물을 포트에 옮겨 담아 끓이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저기, 아가씨.”
“네?”
“그 물.”
애정이 흠칫 놀라서 포트 손잡이를 꼭 쥔다.
“왜요?”
“에버퓨어로 뽑은 거죠? 어때요, 저 정수기? 좋아요?”
남자는 바 한편에 정수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대답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드립커피를 내리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아가씨.”
“네?”
“역시 누가 보고 있으면 잘하던 것도 잘 안 되죠? 너무 떠시네.”
“아……. 네…….”
애정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남자 앞으로 건넨다.
달달달. 커피 잔이 요란하게 떨리자, 남자가 얼른 손을 뻗어 잔을 받았다. 힘줄이 돋은 손이 곱상한 얼굴과 다르게 제법 남자다웠다. 길고 가지런했는데, 손등에 제법 큰 흉터가 있어 외려 거친 느낌이 나는 묘한 손이었다.
남자는 도와주듯 커피 잔을 받았지만 그의 손에서도 어김없이 잔은 흔들렸다. 얼핏 손을 조금 떠는 것 같았다. 그 묘한 진동이 이상하게 남자의 매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얼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슬그머니 약한 듯한 그 떨림이.
애정은 사지말단 부위에 매력을 느끼는 타입이었다. 그것도 흠 잡을 것 없이 반듯한 것보다는 고생이나, 세월의 흔적, 혹은 아픔이 담긴 사연 있는 손과 발을 좋아했다. 애정이 유심히 남자의 손을 들여다보자 남자가 민망한 듯 웃는다.
“뭘 그렇게 봐요? 내 손 잡고 싶어요?”
“네? 아닌데요!”
애정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커피 잔을 들어 향기를 음미한다.
‘5. 4. 3. 2. 1.’
향기를 한껏 맡은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입술을 축이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보였다. 좋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애정은 긴장했다.
“음, 저기요.”
“네?”
“이거 로스팅 매장에서 직접 해요?”
“네, 직접 합니다. 사장님께서.”
“그래요? 낮에 마신 에티오피아도 사장님께서 직접 하셨어요?”
“아, 그건. 그건 제가 했어요.”
“음, 그렇구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 잔을 내려놓는다. 애정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 모습이 퍽 다정했다. 분명히 빌어먹을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자상한 눈빛이 당황스러웠다. 애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웃었다.
“커피 좋아해요?”
“네? 아, 네. 좋아합니다.”
“하긴, 좋아하니까 이 일을 하겠지?”
애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품을 뒤적뒤적하더니 명함케이스를 꺼내 명함 하나를 여자에게 건넨다. 애정은 멋모르고 명함을 받아 들곤 눈을 크게 떴다.
‘뭐요. 지금 작업이요? 참나, 난 댁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
“나도 커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작게 커피숍을 하나 할까 싶은데. 난 아직 잘 몰라서.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조언을 좀 얻고 싶은데.”
“네? 아, 저 그 정도는 아닌데…….”
“여기 매니저예요?”
“네.”
“그럼 매장 운영하는 것부터, 재료나 레시피까지 많이 알겠네요. 그런 정보를 좀 얻었으면 해요. 내가 회사 일로 좀 바빠서 하나하나 신경 쓸 여유가 좀 없어서. 도와주면 상응하는 사례는 할게요. 일당으로 주는 게 낫겠죠? 얼마 정도 받아요?”
남자가 제법 진지하게 물어오자 여자는 더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좀 생각해볼게요.”
“그래요. 그럼 나도 명함 한 장만 줘요.”
“죄송한데. 전 명함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 적어요.”
남자는 냅킨을 한 장 뽑더니, 재킷 안쪽에서 만년필을 꺼내 함께 내밀었다. 애정은 경흠과 원수지간이라는 이 남자와 친분을 맺어도 될까 싶어 잠시 망설였지만, 적을 알아야 그를 구렁텅이에서 구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남자는 냅킨을 접어 주머니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있으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 밖으로 걸어 나가다 살짝 돌아본다.
“이름이 뭐예요?”
“아, 이애정입니다.”
“아, 애정 씨. 로스팅은 애정 씨 솜씨가 낫네요.”
남자는 싱긋 웃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떠난 자리에는 한 모금 마신 뒤로는 다시 들지 않은 커피가 그대로 식어가고 있었다. 애정은 한숨을 훅 내쉰다.
애정은 남자가 주고 간 명함을 들여다본다.
‘서진석’. 평범한 이름이었다.
‘진석이라. 생각보다 개 같지는 않은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