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내는 어인 맥락인지 구보를 반드시 구포라고 발음하였다. 그는 맥주병을 들어 보고 아이 쪽을 향하여 더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다시 구보를 보고 그래 요새두 많이 쓰시우. 무어 별로 쓰는 것은 없습니다. 구보는 자기가 이러한 사내와 접촉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지극히 불쾌를 느끼며 경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와 사이에 간격을 두기로 했다. 그러나 이 딱한 사내는 도리어 그것에서 일종의 득의감을 맛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한잔 십전짜리 차들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그렇게 몇병씩 맥주를 먹을수 있는것에 우월감을 갖고 그리고 지금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구보에게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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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들이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꺼내 들고 그리고 문간으로 향하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 가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문 앞까지 나간 아들은, 혹은 자기의 한 말을 듣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들의 대답 소리가 자기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중문 밖에까지 들릴 목소리를 내었다.
'일즉어니 들어오너라.'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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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소리 안 나게 아들의 방 앞에까지 걸어가 가만히 안을 엿듣는다. 마침내 어머니는 방문을 열어 보고 입때 웬일일까, 호젓한 얼굴을 하고, 다시 방문을 닫으려다 말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나이 찬 아들의 기름과 분 냄새 없는 방이, 늙은 어머니에게는 애달펐다. 어머니는 초저녁에 깔아 놓은 채 그대로 있는 아들의 이부자리와 베개를 바로 고쳐 놓고, 그리고 그 옆에가 앉아 본다. 스물 여섯 해를 길렀어도 종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자식이었다.
설혹 스물 여섯 해를 스물 여섯 곱하는 일이 있다더래도 어머니의 마음은 늘 걱정으로 차리라. 그래도 어머니는 그가 작은 며느리를 보면, 이렇게 밤늦게 한 가지 걱정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 이애는 왜 장가를 들려구 안 하는겐구.' 언제나 혼인 말을 꺼내면, 아들은 말하였다. '돈 한푼 없이 어떻게 기집을 먹여 살립니까?' '하지만…… 어떻게 도리야 있느니라. 어디 월급쟁이가 되드래두, 두 식구 입에 풀칠이야 못헐라구……' 어머니는 어디 월급 자리라도 구할 생각은 없이, 밤낮으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혹은 공연스리 밤중까지 쏘다니고 하는 아들이 보기에 딱하고 또 답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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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다시 비누질을 하며, 대체 그대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여 본다.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 여섯 살 짜리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였다. 우선 낮에 한번 집을 나서면 아들은 밤늦게나 되어 돌아왔다. 늙고 쇠약한 어머니는 자리도 깔지 않고, 맨바닥에가 팔을 괴고 누워 아들을 기다리다가 곧잘 잠이 든다. 편안하지 못한 잠은 두 시간씩 세 시간씩 계속될 수 없다. 잠깐 잠이 들었다 깰 때마다,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아들의 방을 바라보고, 그리고 기둥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다.
자정- 그리 늦지는 않았다. 이제 아들은 돌아올게다. 어머니는 아들이 어서 돌아와 자라고 빌며, 또 어느 틈엔가 꼬빡 잠이 든다. 그가 두 번째 잠을 깨는 것은 새로 한 점 반이나 두 점, 그러한 시각이다. 아들의 방에는 그저 불이 켜 있다. 아들은 잘 때면 반드시 불을 끈다. 그러나 혹은 어느 틈엔가 아들은 돌아와 자리에 누워 책이라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아들에게는 그런 버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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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지나, 밤 늦은 거리를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대낮에도 이 거리는 행인이 많지 않다. 참 요사이 무슨 좋은 일 있소. 맞은편에 경성 우편국 삼층 건물을 바라보며 구보는 생각난 듯이 물었다. 좋은 일이라니. 돌아보는 벗의 눈에 피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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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는 듯 싶은 그들과 헤어져, 구보는 혼자 역 밖으로 나온다. 이러한 시각에 떠나는 그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를 그곳에서 묵을게다. 구보는 문득 여자의 벌거숭이를 아무 거리낌없이 애무할 그 남자의 야비한 웃음으로 하여 좀더 추악해진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고, 그리고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여자는, 여자는 확실히 어여뻤다. 그는 혹은, 구보가 이제까지 어여쁘다고 생각하여 온 온갖 여인들보다도 좀더 어여뻤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다. 남자가 같이 가루삐스를 먹자고 권하는 것도 물리치고, 한 접시의 아이스크림을 지망할 수 있도록 여자는 총명하였다.
문득 구보는 그러한 여자가 왜 그 자를 사랑하려드나 또는 그자의 사랑을 용납하는 것인가 하고, 그런 것을 괴이하게 여겨 본다. 그것은, 그것은 역시 황금인 까닭일게다. 여자들은 그렇게도 쉽사리 황금에서 행복을 찾는다. 구보는 그러한 여자를 가엾이 또 안타까웁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 사나이의 재력을 탐내 본다. 사실 같은 돈이라도 그 사나이에게 있어서는, 헛되이 그리고 또 아까웁게 소비되어 버릴게다.
그는 날마다 기름진 음식이나 실컷 먹고, 싼찐 계집이나 즐기고 그리고 아무 앞에서나 그의 금시계를 꺼내 보고는 만족하여 할게다.일순간 구보는, 그 사나이의 손으로 소비되어 버리는 돈이, 원래 자기의 것이나 되는 것같이 입맛을 다시어 보았으나, 그 즉시 그러한 제 자신을 픽 웃고,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에 걸신이 들렸누……. 단장 끝으로 구두코를 탁 치고, 그리고 좀더 빠른 걸음 걸이로 전차 선로를 횡단하여, 구보는 포도 위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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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자기 뒤를 따라오는 한 여성을 보았다. 그가 한 번 흘낏 보기에도, 한 사나이의 애인 된 티가 있었다. 어느 틈엔가 이런자도 연애를 하는 시대가 왔나. 새삼스러이 그 천한 얼굴이 쳐다보였으나 그러나 서정시인조차 황금광으로 나서는 때다.의자에가 가장 자신 있게 앉아, 그는 주문(註文)들으러 온 소녀에게, 나는 가루삐스 그리고 구보를 향하여, 자네두 그걸루 하지. 그러나 구보는 거의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고, 나는 홍차나 커피로 하지.음료 칼피스를 구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설(猥褻)한 색채를 갖는다. 또 그 맛은 결코 그의 미각에 맞지 않았다. 구보는 차를 마시며 문득 끽다점(喫茶店)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음료를 가져, 그들의 성격, 교양, 취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네들의 그때그때의 기분조차 표현하고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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