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할 때 기억나는 정치적으로 가장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은 바로 전두환이 강조한 “정의 사회 구현”이었다. 그런데 중국을 공부하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표현도 황당함에서 “정의 사회 구현” 못지않았다.
---「첫 문장」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개혁·개방을 했을지라도 여전히 국유기업의 비중이 높고 또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중국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최근 시진핑 집권기만 봐도 과연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인지 의문이 든다.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노동자와 이를 지원하는 학생을 탄압하고, 성희롱에 항의하는 페미니스트를 구속하며, 국가보안법으로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억누르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 p.7~8, 「중국은 사회주의 사회인가?」중에서
중국 혁명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1949년 마오쩌둥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사건을 생각한다. 물론 1949년에 벌어진 일도 혁명이다. 마오쩌둥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한 민족 해방 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고, 노동계급이 주도하지도 않았다.
--- p.12, 「1949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중에서
국가가 생산수단을 통제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고 그 잉여가치로 더욱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체제가 바로 1949년 이후의 중국이다. 이때 국가 관료는 국가, 즉 엥겔스가 말한 “집합적 자본”의 인격체로 나타난다. 이런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인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 p.56, 「국유화=사회주의?」중에서
대부분의 서구 좌파는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에 환상을 품었다. 예컨대 당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좌파들은 마오쩌둥주의자였고 문화혁명을 찬양했다. 미국과 긴장 완화를 추구하고 있던 소련 대신에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혁명도 아니었고 사회주의와도 무관했다.
--- p.60,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중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는 평가가 흔하지만, 그 성장은 불평등 증대와 숱한 탄압과 톈안먼 대량 학살 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자본주의 환경이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 p.88, 「덩샤오핑과 개혁·개방」중에서
중국 지배자들은 1989년 노동자와 학생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언제 다시 그런 저항이 벌어질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톈안먼 항쟁을 발생시킨 원인들을 무지막지한 폭력을 사용해 눌러놓은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루무치나 라싸에서 소수민족의 반란이 벌어질 때, 농민공들이 파업을 벌일 때,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저항할 때마다 지배 관료는 톈안먼 항쟁의 유령이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 p.102~103, 「톈안먼 항쟁과 그 유산」중에서
미·중 갈등은 본질이 서로 다른 사회체제와 좌우 이데올로기를 각각 대표하는 국가 간 충돌이 아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 간의 제국주의적 충돌이다.
--- p.109, 「중국의 급성장과 미국 패권 위협」중에서
시진핑 3연임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중국 지배계급이 시진핑에게 3연임을 하도록 힘을 실어 준 것이 지배 관료의 막강함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 경제와 정치의 위기를 반영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p.125, 「시진핑 체제의 성격과 위기」중에서
시진핑의 공동부유와 홍색 규제에 대해 한국의 일부 지식인과 좌파는 일종의 환상이 있는 것 같다. … 그러나 시진핑 중국의 현실은 ‘다 함께 잘사는’ 것(공동부유)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 중국 언론은 홍색 규제의 대상이 된 기업들이 기부를 크게 늘리고 대중에게 도움을 준다고 부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불평등의 골을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2020년 “세계 부자 보고서”가 발표한 10억 달러(1.2조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슈퍼리치의 숫자를 보면, 중국이 799명으로 미국의 626명보다 많다. 중국 상위 1퍼센트 부자가 국내총생산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 반면, 2020년 5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직후에 총리 리커창이 시인했듯이, 전체 인구의 40퍼센트가 넘는 6억 명은 월 1000위안(약 18만 원) 이하로 생활한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12억 6000만 명은 월 5000위안(약 93만 원) 이하로 생활한다.
--- p.148~149, 「공동부유와 홍색 규제」중에서
대만 문제는 제국주의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양국의 영향력에 휘둘리며 압박을 받는 문제인 것이다.
--- p.164, 「대만 문제의 본질」중에서
중국공산당은 과거에 서방 제국주의를 몰아낸 민족 해방 혁명을 이끌었고, 지금까지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위구르인과 티베트인 등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토록 억압할까?
--- p.169, 「소수민족과 저항」중에서
홍콩 항쟁이 벌어진 2019년은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홍콩 민주화 진영 내에는 미국에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사람도 실제로 있었다. 어떤 신문은 “트럼프가 홍콩을 구원하다”라는 해시태그를 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시위 참가자 중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을 근거로 홍콩 항쟁을 친미적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한국의 윤석열 퇴진 촛불 집회에 민주당 인사들이 참가한다고 해서 그 운동을 민주당 집회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193~194, 「홍콩 항쟁이 친서방?」중에서
시진핑은 “여성은 전통적 가족 가치를 지켜 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구실을 가정 내에서 아동과 노인을 돌보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이는 불황 때마다 그리고 노동력이 부족할 때마다 전통적 아내와 어머니의 미덕을 강조하는 서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p.209, 「중국 여성의 현실」중에서
마오쩌둥이 이끈 공산당은 농촌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도시에서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리려 애썼다. 1930년대 초 한때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규모가 러시아 다음으로 컸다. 그들은 전쟁과 탄압 등 혹독한 시험을 무수히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악전고투하고 고군분투했다.
--- p.212,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