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학습을 위한 산불 데이터셋을 보고 있었다. 게임 엔진의 에셋이 함께 쓰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예측하기 위한 것인지 모호했다. 일상화된 재난을 앞둔 인간이 만들어낸 강박 같기도 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기계학습에서 재난의 풍경은 패턴이었다. 국가적 서비스로 자리잡은 이 플랫폼에는 몇몇의 야생 동물들이 분류되어 데이터셋으로 담겨 있었다. 너구리 데이터셋에는 트레일캠으로 찍혀 있는 야생 상태의 너구리와 어딘가 좁은 공간에 가두어진 너구리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었다. 동물 보호를 위한 데이터셋이라는 설명을 다시 읽었보았다. 객체 인식만 되면 만사형통인 그 생산성을 위한 아이러니함에 잠시 당황했다. 객체 인식을 위한 적절한 외곽을 제공하는 것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시선은 그렇게 또 다시 암흑경에 상속되었다.
--- p.32, 「언메이크랩 -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중에서
전시장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이러한 작품들에 둘러싸여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재난의 흔적들이 여기서는 비미래의 이야기를 생성해 내는 데이터셋이 된다. 그 흔적이 대형 산불 현장에서 주워 온 나뭇조각이든, 산속에 설치된 트레일 카메라가 포착한 멸종 위기 동물들의 영상이든, 정부 주도 토건사업 과정에서 생겨난 기이한 모래산이든,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에 기록된 재난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하나같이 자연성으로 위장된 재난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올 여름은 즐거울 거야〉의 위장 얼룩말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성의 겉껍질은 기계 시각뿐만 아니라 인간의 시각에도 파레돌리아적 인식 결과를 초래해서, 재난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자연의 섭리 또는 신의 의지로 보이게끔 한다.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이러한 인공적인 자연성을 우화, 그러니까 만들어진 이야기로 각색한다.
--- p.62, 「이계성 -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중에서
“행성적인 것(the planetary)”을 “지구적인 것(the global)”, 또는 ‘지구(globe)’, ‘세계(world)’, ‘대지(earth)’와 구분하면서,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의 경험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보편적 역사를?아도르노를 경유해?“부정적 보편사”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제 ‘끓는 점’에 도달했다고 얘기되는 기후 위기의 국면에서 언메이크랩의 이번 전시는 “재앙에 대한 공유된 감각에서 발생하는 [이] 보편적인 것”의 “비미래”를 점친다. 어쩌면, “아무런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말들을 신탁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p.81, 「곽영빈 - 행성의 비미래를 위한 신탁」중에서
비약적으로 넘겨짚자면, 자연, 미래를 장악하기를 원하는 충동에는 진보적 동기 외에도 유한한 수명에서 비롯된 위축감, 온전히 알고 감각할 수 없는 유한한 능력이라는 인류의 집단적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인간에게 미래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이라 콤플렉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보존 충동과 직접 맞닿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더는 야생이 아닌 야생동물의 기묘한 초상은 우리의 불안을 나름의 감각으로 학습한 인공지능의 반응처럼 보인다.
--- p.112, 「심효원 - 자연과 미래의 감정론」중에서
미래가 아직 오직 않은 것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다면, 비미래는 이미 왔으나 그럼에도 영영 오지 않을 것,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엉겁결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우울감과 연관된다.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 아니라 아마도 최초의 미래주의자들을 간지럽혔을 오래된 벌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이 케케묵은 세계와 충돌함으로써 비로소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고 생각했다. 반면 언메이크랩은 그런 기대를 되살리기 어려운 곳에 와 있다. 비미래는 더 이상 미래로의 출발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착지도 아니다. 우리는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비세계에 처해 있다는 것의 한 가지 의미다.
--- p.119, 「윤원화 - 비거주자들의 필드워크」중에서
이 글은 시를 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다. 내 두 번째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를 쓰면서 나는 기계의 감정, 특히 AI의 슬픔을 기술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했다. 나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물론 인간은 결코 타자의 감정을 이해한다거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알아낼 수 없는 것을 쓰고 싶다는 명목하에, 꼭 기계의 감정을 콕 집어서 기술하려 애쓰는 작업에만 몰두할 필요가 있었던가? 조금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나는 인간에 대해 쓰는 일에 매우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늘 동일시를 기반으로 작동하니까, 인간은 인간을 타자로 상정하는 데에 늘 어려움을 겪으니까……. 하지만 기계는 어떠한가? 기계가 비극적인 상황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기계가 정말로 슬픔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슬픔 비슷한 것을 느낀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단코 인간의 것과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기계와 함께라면 영원히 알 수 없고, 영원히 추측해야 하는 것만 써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p.137, 「김승일 - 요약과 기계와 감정」중에서
그러고 보면 어떤 것들은 단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되기도 한다. 꼭 어떤 지식이나 개념과 만나지 않아도, 언어가 없어도, 그로부터 무언가를 알게 된다. 애당초 기억은 (처음부터 그 기억 거리가 언어이지 않은 이상) 완벽히 언어화될 수 없다. 어떤 키워드로 추상화되거나 내러티브의 재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몸으로, 마음으로 반복되는 체험으로 내재되어 있는 정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생성적이다. 그것이 소환되는 맥락에 따라 조금씩 변주되고, 더 복잡해지고, 그러다 어떤 관념이 되기도 하고, 무언가 다른 상태를 불러오니까.
--- p.153, 「백희원 - 시간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