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지배자의 권위를 통해 그들의 이념과 체제에 봉사하는 「아리랑」의 재현을 의도했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아리랑」의 원작자이자 저항적 기표의 생산자로서 조선인의 시각과 독해에 의해 결정적으로 분열되고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엽서 속의 ‘아리랑’은 비록 일제의 유희적 지배와 이국적 소비의 대상으로 점유되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국의 권위와 의미화를 교란하고 방해하는 ‘타자의 불가능성’이었다 하겠다. 요컨대 모방되고 재현될수록 식민화되는 사물(事物[死物])이 아니라 제국의 나르시즘적 요구에 균열을 가하는, 다시 말해 제국의 담론에 문화적인종적역사적 차이를 암암리에 기입하고 각인하는 자율적 언어이자 흔들리는 텍스트였다. 이런 사실은 조선의 입장에서 일제 발 사진엽서 ‘아리랑’의 혼종성이 기여한 긍정성의 한 요소로 보아도 무방하다.
--- p.72, 「제1장 제국의 취향, 전시되는 ‘아리랑’」 중에서
‘일본민요’가 그렇듯이 ‘조선민요’도 제국 본연의 ‘국민의 소리’로 배치개조되기 위해서는, 다시 강조하거니와,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저항성’과 더불어 건전한 국민의식을 방해하는 풍속교란의 ‘외설성’을 아낌없이 솎아내야만 했다. 이 지점에 엄격한 검열과 처벌을 동반한 민요의 순화 및 이상적 악곡의 연출이 그 대책의 앞자리를 차지했던 연유가 자리한다. 또 신분과 빈부, 국가와 민족을 가릴 것 없는 ‘여성’과 ‘눈물’, ‘연정’과 ‘그리움’ 등을 일본 민요(가요)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서정으로 특수화하는 동시에 인간 보편의 감정으로 일반화한 까닭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목소리는 조선의 향락성과 패퇴성, 순종성과 소극성을 어떻게든 드러내는 방식으로 겉치레의 ‘조선적인 것’을 흉내(mimicry) 내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제국의 소리’로 편재되기를 요청받는 ‘조선민요’는 원래의 자신과도 또 ‘일본민요’와도 많이 닮기는 하되 결코 똑같아질 수 없는 이질적이며 변별적인 소리로 영원히 떠돌게 된다.
--- p.135~136, 「제2장 조선의 민요, 원시와 전통의 경계」 중에서
바른대로 말해, ‘조선적인 것’, 특히 ‘향토’와 ‘풍습’이 미약하나마 식민권력의 지배전략과 끊임없이 긴장, 교섭, 갈등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지배체제를 균열, 파열시키며 복수(複數)의 역사를 기입해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조선정시』의 렌즈와 시편들은, 영화 「아리랑」에 맞선 혹은 그것을 전유한 「아리랑」 엽서의 대량 남조가 그랬듯이, 제국과 식민지의 권력관계를 예리하게 드러내는 ‘식민지적 차이’를 은폐, 배제하는 기만적 미학물로 기민하게 작동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향토’와 ‘풍습’을 둘러싼 ‘구경거리(spectacle)’의 정치학이 어떤 미학적 의장과 언어적 풍모를 동원하면서 식민권력의 결속-시학으로 자활, 변신하는가를 따져 묻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 p.149, 「제3장 제국의 ‘조선적인 것’에 대한 전유와 소비」 중에서
백두산∼압록강 일대의 벌목과 뗏목 작업을 둘러싼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몹시 차이나는 목소리를 먼저 말해두는 이유가 없지 않다. 벌목과 뗏목 현장의 실감이나 경험 없이 감상과 관조의 시선에 긴박된 「압록강절」만을 복기하다가는, 풍경과 서정에 숨은 제국의 폭력적억압적 시선을 언뜻 지나쳐, 그들의 식민주의적 관념과 의식, 이미지와 상상력에 어처구니없이 휘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p.250~251, 「제5장 압록강절제국 노동요식민지 유행가」 중에서
‘그림엽서’로 갱신된 「백두산절」의 타락과 폭력화는 군사주의의 자발적인 패션화에 의해 조직되고 수행되었다. 이를 위해 작사자로서 우에다 고쿠쿄시의 지속적 등장과 렌시오, 오다카 히사오의 전략적 투입, 새 판본 제작과 확산을 위한 일제 문화자본의 야합 등이 치밀하게 동원되었다. 이때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존재의 죽음과 파괴를 유인하는 폭력적 행위가 ‘백두산’을 민족과 자아의 태반으로 삼아온 식민지 조선과 만주의 하위주체들에게 집중되다시피 했다는 사실이다. 그림엽서 『선만민요 백두산절』을 군국예술, 곧 파시즘의 예술화의 대표적 형상이자 매체로 지목할 수 있는 제일 조건이 여기서 발생한다.
--- p.372, 「제7장 『백두산절』오족협화총력전」 중에서
숭엄한 ‘천황’의 절대성과 영원성, 이에 목숨 바쳐 충성하는 황국신민의 연성은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교묘하게 조작된 ‘민족-국가(nation)의식’과 ‘향토의식’의 결속 및 실천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이에 따르면, 일제의 향토의식은 천황=일본정신으로 표상되는 민족-국가의식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국민’을 초월한 ‘신민’의 공동체에 내속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일제의 ‘음악교육’은 자연, 계절, 향토, 일상생활, 놀이 등을 즐거이 노래하는(‘향토의식’) 한편 이 모든 것을 역군은(亦君恩)으로 전통화현대화하는(‘민족-국가의식’) 이중의 잠금장치를 통해 신민의 충군애국심을 고양하는 동시에 고착화한다. 순진한 동심의 ‘소학생’들이 성전(聖戰) 의지로 울울한 소국민소병사로 매끈하게 전성(轉成)되는 까닭이 숨어 있는 지점인 것이다.
--- p.503, 「제10장 ‘소국민’의 ‘음악’, ‘소년병정’의 총력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