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평생 두 계통으로 글을 써 왔다. 하나는 필자의 전공 영역에 관한 것으로 농업사, 토지제도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책 원고가 모이는 대로 낱 권 단위로 이를 일조각에서 간행하였고, 그러다가 후에 지식산업사에서 다시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Ⅰ)을 중심으로 계통을 세워, 여러 권의 저작집으로 간행하였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대한민국 학술원의 학술활동에 참여하여, 그 주어지는 주제를 중심으로, 작은 단행본의 글을 쓴 것이었다. 지식산업사에서는 이를 『東아시아 역사속의 한국문명의 전환』으로 간행하였다. 한국사의 흐름을 큰 틀로서 거시적으로 정리한 공을 많이 들인 저술이었다. 그리고 이 두 계통의 연구를 하나의 체계로 종합하고 간추려서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를 간행하였다. 필자의 한국사연구에 관한 저술 저작집은 이것이 전부였다. 필자는 이밖에도 역사연구에 관한 時論적인 글, 고대농업사(고조선사) 연구를 지향하며 쓴 단문의 글이 몇 편인가 있지만, 이는 글의 성격상 이들 저작집의 일부로 편집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료들 가운데는 필자의 이 같은 저작집 편찬에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저작집은 한 학자의 학문 활동 인생을 마감하는 작업임으로, 그 저작집에는 그 학자의 사상이 담긴 글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에는 필자도 동감이나, 필자는 글의 내용에 따라서는 저작집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한국고대농업사 연구』(김용섭저작집 ⑨)를 간행하고, 이어서 나머지 글들을 모아 ‘보유편’의 형태로 정리하였다. 이에 이 책의 제목도 그 취지를 살려서 “해방세대 학자의 역사의식, 역사연구”라고 하였다.
---「머리말」중에서
나는 청소년 시절을 일제 말년의 암울한 시기, 해방 정국의 혼란한 세태 속에서 지냈다. 학생으로서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는 사회과학에 관한 이런저런 책 읽는 것을 더 즐겼던 것 같다. 막연하게나마 장차 경제사를 공부하고 경제사학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곧 6. 25의 비극을 맞아 남북이 분단되고 가족이 이산되는 가운데 인생의 진로 학문의 방향에 적지 않은 조정이 있게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6.25를 미소, 동서 양 진영 간의 냉전의 산물로서 ‘한국전쟁’, ‘조선전쟁’이라 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이 국내적으로는 우리 역사 속의 모순 구조의 발로, 따라서 그것은 계급문제, 체제를 달리하는 정치집단, 국가 사이의 ‘남북전쟁’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다 더 깊이 있고 폭넓게 연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역사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韓國農業史硏究 회고」중에서
전근대적 조선사회의 구제도에서 탈피하려는 법제적 조치로서의 甲午更張은 그 방법과 절차를 고려에 넣지 않는다면은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東學亂의 이념을 받아들인 것이었고, 일본제국이 그 침략주의를 한반도로 진출시킴으로써 야기된 淸日戰爭도 그 구실은 동학란에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동학란은 한국사회의 근대화과정에 연결되고 있으며 동시에 일본제국의 한국침략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서 그 역사적 현실은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 그러나 민족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동학란의 위치가 이렇듯 커다란 비중을 가지면서도 일제하의 한국사학계에서는 문제의 중대성에 반비례해서 놀랄 만큼 이 문제를 등한시하여 왔고 연구된 바도 적으며, 또 연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학의 종교적인 검토나 난의 경과에 대한 평면적인 서술에 그치었다. ... 그것은 종래의 동학란 연구에는 조선봉건사회의 붕괴과정이라는 전환기의 역사의식이 결여되고 있는 때문이며, 혹 그것이 의식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질적인 자본주의세력의 침투로 인한 급격한 사회경제체제의 변동관계에만 치중하고 조선사회 자체 내에서 성장하여 오는 발전적인 素因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고 있지 않은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東學亂硏究論」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