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기득권에 견고하게 뿌리 내린 채, 혁명과 사회 변혁 같은 개념은 물론 몸·인간·하나님 나라 같은 성경적 주제들조차 결여된 용어만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경험에 관한 자료들을 수없이 찾아낸다. 복음주의에 기원을 둔 사회 운동들마저 구조적 불의보다는 개인적인(특별히 성적인) 도덕을 강조한다. 그들의 체면치레용 사회적 관심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정치적인’ 것은 무엇이든 비판하고,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경건주의까지 부활했다.
그러나 새로운 급진적 복음주의가 출현하고 있다. 이는 전통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현상이다. 성경적 신앙에 근거한 사회 참여를 탁월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복음주의의 중심축은 로널드 사이더, 존 하워드 요더, 그리고 짐 월리스와 소저너스 공동체가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관심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_1장 “복음주의와 사회적 관심” _ 복음주의의 변화 중에서
마틴 루터 킹은 교회가 국가의 종으로 부름받는다는 것을 강력히 부인했다. 물론 교회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교회의 역할은 국가의 양심이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세상에 선포하고 세상의 모든 삶과 가치에 도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오늘날 종 된 교회는 예언자적 교회를 대체해 버리는 위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돌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회적 관심이란 단지 여리고 도상에서 사고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만이 아니라 새로운 고속도로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질서, 즉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이 일에 협력하도록 부름받았다.
_1장 “복음주의와 사회적 관심” _ 종으로서의 교회 중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전통 역시 성육신에서 끌어낼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성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였다면, 인류는 하나의 연대solidarity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인간들끼리 서로 하나가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말을 인용해 “네가 너의 형제를 보았다면, 너는 너의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썼다. 만일 참으로 하나님이 인간성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였다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복음서의 말은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신학적 진리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 신학은 인류의 신학적 연합이다. “우리의 완전한 친교는, 세계 곳곳에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역사 속에서 착취와 억압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가난한 자(the Poor One-예수를 말함)의 유일무이한 피 흘림 속에서 이루어진다.”
_3장 “성육신 신앙과 그 결과들” _ 그리스도의 몸과 그 중요성 중에서
머튼은 수도사의 소명과 사회적 저항 사역의 밀접한 관련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에게는 인간의 정화와 해방 그리고 환각의 가면을 벗겨내는 일이 수도사의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들 때문에 그는 관상으로부터 정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가 관상가로서의 역할 대신 운동을 일으키고 시위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의 신학적 통찰이 정치적 통찰로 변했다는 말이다. 이는 그의 신학적 통찰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기독교의 사회 참여는 더 나은 임금과 사회 안전 등을 위한 계획 속에서 (……) 종교를 발견하는 활동이다. 결코 ‘노동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_4장 “토머스 머튼과 저항의 영적 뿌리” _ 수도원주의와 사회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관상은 허공이 아니라 깨지고 타락한 이 세계에서 일어난다. 관상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관상에는 상황이 있다. 다국적 기업·무기 경쟁·강한 정부·경제 위기·도시의 타락·인종 차별·인간의 고독 같은 상황들이다. 혼돈과 위기 한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비전을 추구하고, 관상적 추구의 핵심에 있는 투쟁을 경험한다. 그는 스스로 투쟁의 일부가 되고 사물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관상가는 거짓을 꿰뚫는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릇된 의식과 그릇된 의식에 근거한 세계와 맞서기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다. 수도사는 탐구와 문제 제기, 고독과 내적 갈등, 자기 존재의 황무지 탐색을 통해 세상의 감추어진 음성을 더욱 깊이 듣는다. 그러므로 수도사는 고독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인간의 필요를 더 크고 깊게 의식하게 된다. 수도사뿐 아니라 관상 기도를 실천하는 사?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관상은 점잖게 내적 평안이나 갈등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평화의 원리이기 이전에 갈등과 정화의 원리다. 견딜 수 없는 정화 과정을 감수해 나가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다.
_5장 “관상, 전복적 행동” _ 관상과 투쟁 중에서
은사 쇄신 운동에서의 영적 지도는 문제가 있다. 은사 운동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사람들의 방언 경험은 물론 방언 경험을 통해 주입된 관상에 빠져드는 경험을 초월하여 은사 운동을 지도해 줄 수 있다. 이 운동에서 진짜로 위험한 것은 엘리트주의와 영적 교만, 방언을 ‘영적 고차원’으로 보는 시각이다. 또한 은사주의 특유의 용어와 의식을 매혹적으로 신비화하면서 감상주의적으로 현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은사 운동이 전통을 새롭게 하는 데 새로운 통찰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성례전적 고백의 갱신에 있어서도 분명하다.
우리는 영성과 예언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예배의 중요성을 상실할 때 결국 교회는 맘몬의 가치 체계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관상 기도의 중요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대한 관상 기도의 비전이 없다면, 종교는 아편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_7장 “현대 세계의 영적 지도” _ 영성과 예언의 일치 중에서
영적 지도는 정서적 고통이나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 영성의 길은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영적 지도는 예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영적 지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비판적이다. 영적 지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미심쩍은 가치들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기독교 신학은 치유와 상담의 정치학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치유와 상담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있을 뿐인가? 사회 적응의 근본적인 가치를 문제 삼지 않은 채 말이다. 정말로 중요한 전환점은 내적 건강과 내적 해방의 추구가 외적 건강과 외적 해방의 추구와 충돌할 때 찾아올 것이다.
_8장 “영성ㆍ심리치료ㆍ정치” _ 영적 지도의 본질 중에서
복음서들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구마는 노예 상태와 압제로부터의 인간 해방, 타락한 세상의 정사와 권세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표상한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 운동은 마귀의 상징을 왜곡하는가 하면 마귀론에 대한 해롭고도 균형을 상실한 편견에 빠졌다. 대부분의 개신교 이면에 있는 개인주의적 신학은, 신학적으로는 건강하지 않고 목회적으로는 위험하며 사회·정치적으로는 악에 대해 우파적인 관점으로 이끈다. 목회적으로는, 악을 사적인 영역으로만 보면 사람들을 심각하게 잘못 다루게 될 수 있다. 오순절파의 관점을 지닌 열정적인 구마자와 치유자들의 손아귀에 빠져버린 정서장애인의 사례는 많다. 게다가 사회·정치적으로 보면, 오순절주의의 잘못된 마귀론은 정말로 마귀적인 세력들에는 눈멀게 하고, 그로 인해 마귀 세력들을 지원하게 될 위험이 있다.
_9장 “은사 운동과 마귀들” _ 은사 운동과 그 위험성 중에서
나는 파시스트 운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기독교, 혹은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로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조악한 근본주의 신학과 극우 정치에 대한 지지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분명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와 정치 우파는 연합해 왔다. 1920년대에 복음주의자들은 ‘사회 복음’의 과격성에 반발했고, 자신들이 주류인 사회 중산층의 가치를 반영했다. 그들은 사회 참여에 대한 관심을 뒤집어 개인적인 악, 개인 구원을 선포하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문제에서 점점 더 보수적이 되었다. 현상을 유지하려고 그들은 우익 정당과 손을 잡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절규를 멀리했다. 체제를 지지하는 일은 곧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고, 사회에 도전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다. 예언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기존 구조를 바꾸려는 사회, 정치 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자유주의’는 물론 심지어 ‘공산주의’와 동일시되었다.
_10장 “파시즘의 본질과 특성” _ 기독교 근본주의와 극우파 중에서
나는 우리가 더 억압적이고 불관용적인 사회로 가고 있다고, ‘은밀한 파시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근본주의와 종교적 광신의 부활은 대단히 위험하다. 오늘날 많은 신학이 안고 있는 내세 중심적 경향이 역전되고 기독교적 예언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이 위험한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파시즘의 성장을 돕고 그 이데올로기의 부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파시즘’이라기보다는 불량품 신학이다. 히틀러에 미혹되었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특낺히 사악하거나 특별히 인종 차별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히틀러 자신은 명백하게 반기독교적인 영향력을 공개적으로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히틀러는 진짜 기독교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도덕 질서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위험을 방어하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호소는 아직까지도 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반응하기에 앞서, 역사의 교훈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_10장 “파시즘의 본질과 특성” _ 근본주의의 부활 중에서
최근의 정치적 상황은 ‘전 지구적 우파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가족·국가·애국·자유 기업·권위·법과 질서 같은 전통 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을 옹호한다.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우파들의 쇼’가 상영 중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이중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교회는 우파로 변해가는 상황을 종교적으로 인가해 주고 싶은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둘째로, 교회는 거짓 영성으로 물러날 수도 있다. 거짓 영성은 “인간 내면의 영혼”과 “천상의 불멸성”에 대한 관심이다. 교회는 제3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학적·영적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붕괴될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선택이 실제로 옳은 것이고, 교회가 비판적인 예언자 역할을 회복하도록 부름받았다면, 교회는 또한 관상 기도와 정치의식이 하나가 되는 신학적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기독교 의식의 새로운 전환점, 즉 신비와 정치의 새로운 통합을 위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 그러려면 정통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_12장 “신학의 갱신과 사회 변혁” _ 우익 시대의 교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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