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머릿속이 미친 듯이 들끓으며 억제하고 있었던 온갖 잡념들이 봇물처럼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염체, 리의 얼굴, 십자가, 푸름빛, 준후의 얼굴, 죽어가는 케인의 모습. 푸른 하늘빛, 블랙써클, 현암과 신부님, 유체, 염체, 환영들 그리고 알 수 없는 혼돈…….
그때 뒷전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보니 주변은 전반적으로 붉은 빛깔을 띤 듯했으나 여러 가지 색깔들이 뒤섞여서 음침하게 빛나는, 넓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텅 빈 공허함 속이었다. 그 안에 연희는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앉아있는 것도 아닌, 마치 떠 있는 듯한 자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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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독자분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특별히 공포감을 조장한다거나 끔찍한 표현을 남발하고픈 생각도 없고, 공연히 호기심만 자극하는 선정적이거나 편협된 글을 나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추운 겨울이라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화롯가나 아랫목 구석에 앉아서, 더운 여름이라면 모깃불이라도 피워 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부채질이라도 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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