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은 ‘유쾌함’으로 그 무거움을 줄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사 내부는 물론 언론 소비자인 시민을 설득할 수 있었다는 데에서 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단지 악플이라는 돌팔매질에 몸을 웅크리고 있거나 기껏해야 투덜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돌 던지는 그들을 미디어의 장으로 직접 끌어들여 설득하고, 안 되면 대놓고 사과하면서 부딪히는 것.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언론사 내부의 불협화음조차도 그 장에서 녹여낼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론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유쾌함’도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것으로 폄훼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본의 아니게 나는 이 추천사의 문장을 모두 과거형으로 쓰고 있다. 추천사를 쓰는 와중에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의 폐지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유쾌하지 않다.
- 손석희 (언론인)
말하는 만큼 듣고, 들은 만큼 실천하겠다는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이 만들어지고 사랑받은 건 어찌 보면 당연했을 터이다. 소통을 위해 통로를 만들고, 시청자와 청취자, 구독자의 댓글을 모아서 읽고, 설명하고 반성하며 쌍방향 소통을 시도했으니까.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을 기획한 김기화 기자는 1년 넘게 일일이 대댓글을 다느라 손가락 건초염까지 걸렸으니까. 이 책은 바로 그 5년의 시간과 공간을 돌아본다. 25만 구독자와 함께한 성공과 실패를 정리한다. 이 책이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의 끝이 될는지 혹은 새로운 시작이 될는지, 독자 여러분이 해 주실 소통이 몹시 궁금하다.
- 이금희 (방송인)
기특하다.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을 쭉 지켜본 마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렇다. 현실이 이렇게 시궁창인데, 소통한다고? 그런데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은 했다. ‘본격 소통 방송’을 표방한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이 동료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고통과 공포를 이겨 내고 시민과 융합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음성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하늘은 한 가지 색이 아닌 수천만 갈래의 빛깔이 뭉쳐 있는 거라는 데 절망하면 어쩌나 싶었다. 신기하게도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은 꿈틀대며 암벽을 타고 올랐다.
- 정준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