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젖어 들었다. 나는 그를 꼭 붙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이렇게 좋은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늘 그런 법이다. 좀 불편하게 자면서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아주 먼곳으로 떠나는 법이다.
---p.29
서로에 관해 평가를 내리는 일이 나는 아주 싫었다. 그건 중독이다. 저주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서로에 관해 내린 평가로 이루어진 그 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독일을 떠났다. 평가를 내리는 자와 평가를 받는 자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고, 각자가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중 한 역할을 수행한다.
---p.45
바다는 조용했다. 대기는 안정되어 있었고, 아침 8시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렇게 침묵하는 자는 은밀하게 뭔가 나쁜 일을 꾸미는 법이다.
---p.53
그는 내가 얼마나 용감하고 착한지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미치도록, 세상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한단다. 자신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그의 천사이니까. 그의 울음이 격해진다. 나는 그의 이런 살가움을 마치 마약처럼 빨아들인다.
---p.80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당신이 욜라한테 달아올랐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충고를 하나하자면 조심하라는 거지. 지금 나는 그녀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뭔가를 계획하고 있어. 오늘 잠수할 때 했던 행동들은 그녀가 뭔가 일을 꾸밀 때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들이지.”
---p.95
어쩌면 내가 받은 법학 실습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인식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p.99
스벤이 나에게 보여 주었던 것처럼. 그가 여기 있다면. 그가 내 손을 잡아 준다면. 내가 호흡하도록 그가 자신의 공기를 나누어 준다면. 육지에서도 내겐 잠수 강사가 필요하다. 이 고약한 삶에 질식해 죽지 않도록 가르쳐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p.105
그리고 당신은 전혀 손을 떼지도 않았어. 당신은 과도한 요구를 받은 21세기의, 과도한 요구를 받은 전형적인 인간일 뿐이지. 세기 전체가 과도하다니까! 지난 1000년의 결말이 어때 보였는지 아나? 거대한 기회, 거대한 자유. 모두가 그걸로부터 뭔가 만들어 내고자 했지.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너무 많은 거야. 너무 많은 세상,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가능성. 그래서 모두가 망명하는 거야, 나의 친애하는 좆같은 놈이여. 비더마이어로, 육지로, 취미로, 노스탤지어로 혹은 섬으로도. 모든 것에 퇴각 전투 신호가 내려졌고, 당신은 그 한가운데에 있어.”
---p.135
지나간 시간의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일은 쉽다. 도대체 얼마나 멍청했고, 얼마나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 했단 말인가. 돌이켜 볼 때에야 비로소 그 유형이 드러난다. 비록 어떤 설명도 찾을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제대로 하려는 우리 시도는 다들 알다시피 항상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된다.
---pp.201-202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바닥에 앉아 내게서 아가미가 자라나게 하고 싶었다. 장비들을 내려놓고 선장실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 내가 직접 발견한 행성 피들러호. 아무도 나를 쫓아올 수 없는 나라. 장비를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아가미로 호흡하고, 그리고 …….
---pp.270-271
나는 망설였고, 의식을 잃고 물에 빠진 테오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욜라를 생각했다. 그러고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테오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두지 않았고,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 결정에 대한 고마움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 왜 내가 십사 년 동안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을 그토록 매력적이라고 여겼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추한 개념이었다.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