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통합은 근대의 산물
19세기 이전의 유럽통합 사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듯, 민족주의를 자신의 존립 근거로 삼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유럽통합 역시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전반기 복고 체제의 신성동맹과 같은 전근대적 국제 관계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왕조 국가에 기초한 유럽통합 사상은 전근대적 형태이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통합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판단하여 이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제외했다. 무력으로 통합을 시도한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본서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들의 유럽은 회원국 간 평등성에 기초한 오늘날의 통합 유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 p. 13
하나로 수렴되는 마치니의 민족주의와 유럽통합 사상
마치니는 세간에 민족주의자로 널리 통하고 있지만, 그가 유럽통합론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치니의 사상에서 민족주의와 유럽통합 사상이 수렴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한 수렴은 필경 19세기 ‘자유주의 시대’라는 역동적인 사유 공간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실, 이와 같은 사유 공간에서 마치니는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려 했고, 나아가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들의 형성이 민족 간 갈등이 아니라 민족 간 평화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확신함으로써 유럽통합의 사상을 성숙시켜 나갔다.
--- p. 42
논리적인 그러나 달성하기 어려운 프루동의 연방주의 구상
프루동은 1848년 혁명 실패 이후 자신이 새로운 사회조직 원리로 제시했던 상호주의 이론을 연방주의와 연결시킨다. 정치조직은 가변적이다. 진정한 변혁은 사회적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보다는 산업 조직이, 헌법보다는 경제적 관계가, 겉잡아 말해서 정치보다는 경제가 먼저 연방주의의 토대 위에 설 때 국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 연방제 정치 구조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프루동의 연방주의는 단순히 국제 관계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내의 사회 재조직 문제와 연결되며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을 긴밀하게 통합시킨다. 훗날 연방제 이론가들이 프루동의 이론을 ‘총체적 연방주의’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프루동의 이론 체계는 여느 연방주의 이론들보다 더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었지만, 그만큼 더 달성하기 힘겨운 구상이기도 했다.
--- p. 75
유럽의 바다에서 사투를 벌인 노인, 스피넬리
그렇다면 스피넬리는 어떤 사람인가? 많은 이들이 헛소리로 비아냥거린 유럽연방의 이상을 고수하면서 제도 정치권에 오래 몸담고 있었고, 또 정치적 실패를 연이어 겪으면서도 연방주의적 원칙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스피넬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한 연구자는 스피넬리의 일생을 조감한 뒤에 그를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에 비유한다. 일생일대에 가장 큰 고기를 잡았으나 사투를 벌이며 항으로 끌고 오는 동안 상어에게 모두 뜯어 먹힌 고기의 앙상한 뼈만을 가져온 바로 그 노인 말이다. 그러나 노인은 패배자가 아니다. 그는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비유는 스피넬리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 p. 160~161
‘좋은 유럽인’ 아데나워
유럽 통합 과정은 서방 연합국의 입장에서 볼 때 난해한 독일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이었고, 서독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주권국가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외교정책은 양면을 가진 동전의 특성에 비유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한 면은 독일의 주권 회복이라는 목적을 가진 독일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한 면은 유럽 통합을 추구하는 유럽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유럽 통합의 도구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방적으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아데나워의 유럽 통합 정책의 성격에 대한 왜곡된 상을 그리게 될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왜 그에게 ‘좋은 유럽인’ 혹은 ‘유럽 통합의 선구자’라는 찬사가 허락되었는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 pp. 234~235
일국의 대통령에서 유럽주의자로 변신한 미테랑
미테랑이 유럽주의자가 된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의 일이다. 1981년 미테랑의 대선 공약에서 유럽에 대한 언급은 극히 드물다.…… 미테랑은 당선된 후에 ‘유럽 사회 공간’의 창설과 ‘유럽의 경기 활성화를 위한 계획’을 제안하지만 다른 회원국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미테랑이 적극적인 유럽주의자로 돌변하는 계기는 1983년 경기 활성화에서 안정화 정책으로의 전환 때문이었다. 사회당은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약속쿇고 집권하였지만 정책 전환으로 그 정반대의 긴축재정과 임금동결이라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돌파구와 새로운 이상적 목표가 필요했던 미테랑에게 유럽이라는 쟁점은 안성맞춤이었다. 미테랑은 이때부터 위대한 유럽인, 비전을 가진 유럽의 건축가라는 역할을 자임하기 시작했다.
--- pp. 318~319
“브뤼셀의 황제”, 들로르
들로르는 ‘미스터 유럽(Mr. Europe)’이라는 수사가 항상 따라다닐 정도로 유럽통합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이끈 유럽공동체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그는 10년 동안 유럽공동체의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유럽공동체의 대통령과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여, ‘유럽의 차르(Czar of Europe)’ 혹은 ‘브뤼셀의 차르(Czar of Bruxelles)’로 불릴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과 단일유럽시장 설립을 완성하고 경제통화동맹(Economic and Monetary Union, EMU)을 통해 단일화폐인 유로(EURO)의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정치공동체로서 ‘유럽’의 출발점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 pp. 328
대처의 유럽통합 정책 평가
대처의 유럽 통합 정책은 어디까지나 민족국가 중심의 협력을 축으로 이루어졌다. 유럽 무대에서 대처가 종종 구사한 극단적인 수사가 다른 회원국 수반들과 언론의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영국의 국익을 추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영국은 아직도 주요 정당 간에 그리고 주요 정당 내부에서도 유럽통합에 대한 합의가 없다. 따라서 영국의 총리는 보수나 노동당 출신이냐를 막론하고 유럽통합 정책에 대한 재량권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당내 합의나 정당 간 합의가 없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총리나 정당 지도자나 되도록이면 이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대개 독일과 프랑스가 정책을 제안하면 이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처도 영국의 이런 유럽 통합 정책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대처는 유럽 통합을 위대한 프랑스를 실현하는 도구로 간주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유럽 통합에서 민족국가의 역할과 초국가기구의 역할, 그리고 양자 간의 긴장과 균형은 아직도 계속되는 핵심 쟁점이다.
--- pp. 37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