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의도적으로 늙은이라는 말을 쓰는데,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노령자, 고령자, 노인, 노년, 노친네, (여성의 경우) 노파 등 나이 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도, 어감에 있어서나 듣는 사람의 기분에 있어서나 다 다르다. 노령자나 고령자는 주로 정부의 행정 문건에 등장하는 말이다. 노인은 나이 든 사람을 가리키는 가장 일상적인 용어이면서 당사자들이 결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호칭이기도 하다. 노인이라는 말에 두껍게 달라붙어 있는 부정적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노년학이나 노년 인권을 비롯해 노년층의 존엄을 고민하는 영역에서 노년이라는 말을 사용하자는 제안이 나오는 이유다.
--- pp.14~15
내가 소녀일 때 ‘나답게’는 사회가 규정하는 ‘소녀답게’와 싸우며 협상한 결과이고,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을 때 ‘나답게’는 사회가 칭송하는 ‘엄마답게’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몸부림친 과정이다. ‘나답게’는 그렇게 생애 모든 단계에서 투쟁하고 타협하고 뛰쳐나가고 피 흘리며 항복하면서 구성되고 또 재구성되었다. ‘나답게 늙어가기’란 ‘나답게’ 살기 위해 경험한 그 모든 과정에서 배운 것을 기억하며, 그것의 되새김질 속에서 늙어감과 노년 되기와 노년으로 살아가기를 수행하는 일일 것이다.
--- p.18
그러나 밭이 있으면 작물을 심고, 먹고 남을 만큼 작물이 풍성하면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할머니 농부들이 따르는 밭의 논리일 테다. 유기 농부와 언니 동생 하며 이웃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래로 약을 전혀 쓰지 않는 할머니의 의리 또한 밭의 논리에 사람의 관계를 보태는 할머니 나름의 자존심이다.
--- pp.31~33
베란다와 방 사이 문을 다시 달기. 베란다에 쌓인 짐들을 철제 수납장에 정리하기. 썩어가는 베란다의 나무 바닥을 덜어낸 다음 청소와 방역하기. 고장 난 먼지 덩어리 버티컬을 떼어내고 창문에 단열 시트지 붙이기. 주요 이동 통로에 안전 손잡이를 설치하고 화장실에 미끄럼 방지 매트와 거치식 안전 손잡이 설치하기. 시공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개선책 하나가 ‘더’ 마련되었다. 현관에 의자를 하나 놓는 것이었다. 시공이랄 것도 없는, 오히려 아이디어에 속하는 이 단순한 조치가 의족을 하는 할머니에게는 ‘정말 필요한’ 변화였다.
--- pp.51~52
‘벽에 똥칠하는’이라는 형용어구는 모든 사람에게 상상하고 싶지 않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배설물의 통제는 사람 되기, 즉 사회화의 첫 관문이요 상징이다. ‘누가 내 똥오줌을 받아줄 것인가’는, 늙어가는 과정에서 때로 필연적일 수 있는 질문이나, 실제로 ‘벽에 똥칠하는’ 누군가는 그런 질문 자체를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 p.79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은 묘하게 아름답다. 웃을 때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주름들은 길게 이어진 밭의 이랑과 고랑을 연상시킨다. 밭을 옆에 끼고 한 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던 유년기의 추억 때문인가, 나는 밭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들의 주름을 볼 때도 비슷한 안도감을 느낀다. 밭의 이랑 고랑도, 할머니들의 주름도 아주 평범하지만 들을수록 찰지고 구성진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들의 아카이브인 것이다.
--- p.92
이 모든 논의 저변에는 평등하지 않은 자원의 문제가 있다. 이 사적 불평등을 어느 정도라도 해결해줄 수 있는 복지 시스템이 부재할 때 ‘생의 마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유의 문제이기 이전에 평등의 문제가 된다. (…) 그런데 왜 ‘위드 치매’는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요양 시설의 탈시설화 가능성을 찾으면서 요양 시설을 또한 ‘내가 갈 수도 있는 곳’으로 상상하고, 삶이 가능한 곳으로 만드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왜 치열하게,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는 것일까. 함께 도모하고 투쟁해야 할 공적인 일이 개인들의 사적 두려움과 불안에 머물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떠안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이라면 더 전면적인 대면이 필요하다.
--- pp.101~102
“‘지나가겠지’ 또는 ‘버텨내지겠지’ 그런 힘들을 배웠죠. 포기하지 말고, 버텨보자. 태풍도 버텨보고, 가뭄도 버텨보고, 장마도 버텨보자. 그러면 결국은 또 씨앗을 맺더라. 한 알일지라도 결국에는 씨앗을 맺는다. 밭을 일구는 할머니들을 보면 다리도 고장 나고 허리도 고장 나서 너무도 고단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아마 항상 무언가를 살리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봐요. 저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 p.128
그의 몸은, 그의 몸이 살아내는 그의 삶은 매우 의존적이며 동시에 대단히 자율적이다. 그는 휠체어를 비롯해 보청기나 틀니·인공호흡기·돋보기 등 의료기기에, 그리고 활동지원사와 파트너·동료에 ‘기대어서/매달려서’ 산다. 잘 기대고 매달려 왔다. 그의 기대고 매달리는 기술력은 기대면서 삶을 조율해온 긴 역사의 소산이다.
--- pp.140~141
그는 말끝에 다시 “어, 너무 긍정적이면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울 텐데”라며 또 깔깔깔 웃는다. 그러나 이 긍정성이 선천적 성향 때문만일까. 통증을 잘 참는 것, 매번 새롭고 날카로워 익숙해질 수 없는 통증을 가능한 ‘최소화’하는 것은 예측 불가한 몸을 가진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그 나름의 ‘살핌’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최최중증 장애인’인 그와 일하면서 일상적으로 걱정하는 동료들이 더 힘들고 불안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아픔은 상대적인 게 아니건만 아프고 힘든 상황에서도 ‘미경 님도 저렇게 힘든데’ 하며 차마 말하지 못하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 p.145
“‘성적 잘 못 받겠어, 나는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아. 근데, 그래도 나는 차별받고 싶지 않아…… 나 안 하고 싶어, 나 안 할 건데, 안 한다고 내 삶이 망하지 않길 바라.’ 이런 식의 발화들, 취약함을 드러내는 이런 발화 방식은 한국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게 조금이라도 가능해지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 p.166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던 이들이 최종적으로 가난에 빠지기 쉽다는,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증명된 삶의 구조적 경로가 있다면 그것에 주목하면서 노인복지를 구성해야 한다.
--- p.186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빈곤은 죽음보다 더 강력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가난에 빠졌을 때 목숨을 끊는 일들이 반복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홈리스를 비롯해 극한 빈곤 상태에 처한 이들의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사람다운 일상을 위해 이웃의 선한 마음을 촉구하는 따위의 해결책을 찾아서는 안 된다. 선한 이웃의 도움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공공복지의 책무를 희석하기 때문이다.
--- p.189
트랜스젠더 노년을 만나기 어려운 건, 심한 우울증 등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늙어가는’, 즉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지는 트랜스젠더가 드문 까닭도 있다.
--- p.216
지금은 늙어감의 다른 길을 상상하고 실제로 구현하는 모험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다른 생애 단계에 비해 사회와 국가의 인정과 지지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노년기에 주어진 제약과 상투적 해석, 빈곤의 두려움과 돌봄 의존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향한 집단적 모험이 필요하다. 이 집단적 모험은 어느 때보다 실험적이고 급진적이어야 한다.
--- p.235
50이 넘어, 60이 넘어 매우 낯선 곳, 새로운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는 건 쉽지 않다. 그곳이 늘 ‘예외’로,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혐오의 정동으로 터질 듯 부풀어 있고, 실패의 모든 부정적 감각이 폭력적·악의적으로 투사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몇이 되었든, 내가 어디로 끌리는가. 최현숙의 말을 빌리자면 어디로 ‘꼴리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유희적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묻는 건 포기해선 안 되는 자기 돌봄이다.
--- pp.255~256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적응과 성장 중에서도 늙어가는 일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적응과 성장을 요하는 일임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주, 아주 자주 깨닫는다.
--- p.263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적절하게 협상하면서 살 수 있는 문화적·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몸들이 공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이 다른 몸들이 평등하게 서로 ‘몸’ 정체성의 지각이 되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 pp.264~265
노인요양 시설에서 집단 감염의 희생자가 된 많은 노년들을 떠올린다. 격리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지라도 그분들의 마지막 전언이 ‘충분히 좋았다’였기를 기원한다. 누군가와 애틋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그분들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누군가 들려줄 것이다.
--- p.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