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늦게나마 네 번째 시집을 출간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책을 구입하면서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올라온 인터뷰도 읽었습니다. 꾸준히 강의와 마감을 하며 바쁘게 지내시는 것 같더군요. 출강하시는 학교는 바뀌었지만요. 『무칭』. 제목이 좋네요. 사전에 있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막상 찾아보니 사전에 없는 게 왠지 선생님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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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주변에는 항상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고, 이들의 열의가 꺼지면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러한 교체 현상을 자연의 순환과정처럼 바라보게 되면서 저는 은몰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게 됐습니다. 제 포기에 대해서도요. 밀물과 썰물, 나아감과 물러섬, 쓰는 사람에서 읽는 사람으로, 정체성만 바뀔 뿐, 여전히 문학이라는 공동체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은 제가 아는 가장 진실한 공동체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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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는 업계에 들어와 배운 건 읽지 않는 법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혹평들은 개인의 감상일 뿐이고, 찾아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삶의 경계를 침범하는 건 명백한 악의였다. 세언은 보낸 이의 정체는 몰라도 목적은 알았다. 상대가 원하는 게 그녀가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거란 걸. 위협적인 말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었고, 지나가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며 길바닥에 침을 뱉는 남자들처럼 그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냥감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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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합평에서 세언이 소설에 쓴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 애는 말했다. “핑프.” 이어진 말에 곳곳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세언은 집에 도착해 그 애가 한 말을 검색했다. 핑거 프린세스. 등 뒤에 포스트잇이 붙은 것도 모른 채 하교하던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화가 나기보다는 모욕을 당해도 모욕인지 모른다는 게 겁났다. “늙으면 콧물이 흐르는 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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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뭐라고. 세언은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려다가 다시 지퍼를 닫았다. 아니, 이름이 전부였다. 세 권의 단편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 남은 건 이름뿐이었다. 여태껏 그녀는 소설을 통해서만 말하려고 했고, 그 이름에 얼룩을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이름인데, 그 애는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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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간 온 메일이 열일곱 통. 세언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았다. 과거에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든,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런 행동은 엄연한 범죄라고, 일전에 스토킹을 당하는 동료에게도 단호하게 신고하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신고를 했을까, 안 했을까. 그 조언을 하고 잊어버려서 어떻게 됐는지 듣지 못했다.
--- p.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