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은 1857년부터 5년간, 엑스의 그라네 미술관 안에 있는 무료 야간 시립 데생 학원에 다니면서 스페인 신부 조제프 지베르(Joseph Gibert, 1806-1884)에게 그림을 배운다. 그리고 1858년과 1861년 사이에는 미술 수업을 병행하며 아버지의 강요로 엑스 대학교 법학부에서 2년에 걸쳐 5학기 동안 법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그것이 자기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중퇴한다. 세잔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법이, 솔직함이라고는 없는 이 끔찍한 법이 3년 동안 내 인생을 참혹하게 만들 거야.”라고 하면서 그림에 더욱 이끌린다고 고백하고는 파리로 갈 결심을 굳힌다. 1860년 2월, 세잔의 아버지는 지베르가 승인한다는 조건하에 아들을 파리로 보내기로 한다. 자신을 향한 아들의 비난하는 시선, 우울한 침묵, 간신히 억제된 반항심 등등 때문에 더는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안은 얼핏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화해적인 움직임으로 보였지만, 졸라가 의심한 것처럼, 학생을 잃고 싶지 않았던 지베르는 아버지에게 “세잔이 여전히 엑스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말했다. 덕분에 아버지는 아들과의 1차전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세잔은 모든 꿈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림에 대한 욕망도 잃게 되었다.
---「세잔의 방황」중에서
이처럼 실험하듯이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졸라가 자신의 문학을 뒤에 ‘실험소설’이라고 부른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 소설가는 상상 속에서 창조해 낸 등장인물에 대해 자연과학자들이 하듯 실험이나 임상 실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불행과 범죄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허약함과 사악함을 이해하게 해 주는 귀중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최초로 보여 준 작품이 『테레즈 라캥』이다. 졸라는 유전이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즉 신경의 허약함과 피의 사악함은 각각 한 사람의 신체 조직이 가진 ‘기질적 기능 장애’의 결과이며, 이 장애는 그의 모든 자손에게 어김없이 유전되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우저가 말했듯이 졸라는 “결정론자이기는 하지만 운명론자가 아니다. 말을 바꾸면,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생활의 물질적 조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기는 하지만, 그 조건이 불변의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하우저86) (…) 졸라는 당시 유럽 학계에서 새롭게 부상하던 유전학을 토대로 『루공-마카르총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졸라의 문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덕과 윤리를 비롯한 휴머니즘이 졸라 문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루공-마카르총서』의 부제는 ‘제2제정하의 한 가족의 자연적·사회적 역사’였으며, 가상의 가계도를 설정하고 가계도 내의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일생을 서술하는 듯한 방식을 취한다. 그 서술방식 때문에 19세기 후반의 사회사 자료로 귀중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에밀 졸라의 주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징은 여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팜 파탈로서의 여성이다. 뒤에서 보는 『싸구려 술집』의 주인공의 딸인 창녀 나나를 주인공으로 한 『나나』는 아주 고전적 팜 파탈 문학의 대표작이다. 노동자 혁명에 대해 다룬 『제르미날Germinal』까지 이 범주에 들 정도로 에밀 졸라의 유전에 대한 믿음은 분명하다.
---「『테레즈 라캥』, ‘실험소설’의 탄생」중에서
1880-1883년 사이에 생트빅투아르 산을 배경으로 그린 초기 그림들과 1885-1888년 가르단린(Gardanne)에서 그린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 작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1878년부터 1887년 사이를 구조주의나 고전주의 또는 고전적 구성의 시기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뒤에서 보는 다섯 점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 그 뒤로 세잔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된다. 그러나 한층 성숙해진 작품들에서 그는 거의 건축에 가까운 견고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한평생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가 당시 작품에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간단한 색채를 사용한 배경이다.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 것과, 푸생(Poussin)의 ‘자연을 따라서’를 재구성한 작업 역시 세잔이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통합하고 싶어 했던 열망을 강조한 것이다.
---「세잔의 구조주의 시기」중에서
1898년 1월 13일, 드레퓌스파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 속에서 소설가 에밀 졸라는 클레망소가 펴내는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Felix Faure, 1841-1899)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했다. 그는 3일 전에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이 조작된 증거와 졸속 재판을 통해 무죄 석방된 것에 대해 격노하며 이 글을 썼다. 그 글이 발표되면 작가로서의 자기 경력에 얼마나 손실이 될지, 특히 그가 오랫동안 열망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될 수 없음도 잘 알았다. (…) 졸라는 사건 전체를 스무 쪽으로 요약하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썼다. 그는 정부와 군부를 비판하고 재판과 관련하여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사건의 진실을 알렸다.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육군의 명령으로 에스테라지를 풀어 주었다고 고발했다. (…) 이 글의 원제목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로로르』의 편집장인 클레망소의 권유에 따라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그 편지의 처음에서 졸라는 제3공화국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부당한 구속수감을 비난하며 여러 가지 사법적 오류와 증거의 부족을 지적한 뒤 국민이 “‘더러운 유대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인간 제물이 된 한 불행한 사람의 운명 앞”에서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고 썼다. 그러고는 “광기와 어리석음, 황당무계한 상상력, 저열한 수사 방식”이 여전히 프랑스 사회를 근간 채 흔들고 있다고, “몇몇 장교들이 나라를 짓밟고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불경한 거짓 핑계를 내세우며 국민이 외치는 진실과 정의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다.”라고 규탄했다.(전진209) 즉 국가를 위해 드레퓌스의 유죄를 날조했다는 것이다.
---「졸라의 등장, 나는 고발한다」중에서
세잔의 사과는 유명하다. 어린 시절 졸라가 세잔에게 사과를 선물하여 우정이 싹텄다거나 세잔이 사과로 세계를 정복했다는 이야기 등도 앞에서 보았다. 그런 세잔의 그림에서 사과는 성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도 해석되곤 했다. 서양에서 사과는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따먹는 과일로 원죄와 타락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랑의 상징이자 비너스(아프로디테)의 부수물이고, 결혼 의식의 제의적 상징물이고, 서양 문학에서는 사랑의 선물이자 여성의 가슴을 비유했다.(샤피로11, 14) 졸라는 ‘거대한 정물화’라고 불린 『파리의 배』(1873)에서 사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는데, 세잔도 이를 분명 읽었을 것이다. (…) 세잔이 사과를 즐겨 그린 것은 사과가 잘 썩지 않고 오래가고 그 형태와 색깔이 다양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체의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인 세잔에게는 사과처럼 밝은 색채에 단단하고 둥근 물체가 가장 이상적인 소재였다. 세잔의 그림은 그 대상이 인물이든, 풍경이든, 정물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같다. 정물화에서도 세잔은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본 어떤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시점에서 본 모티프를 모아 색채와 형태를 조정하여 하나의 조형 작품으로 재구축한다.
---「석고상이 있는 정물」중에서
세잔은 무뢰한, 졸라는 도덕인(이라기보다는 모랄리스트)이었다. 세잔은 예의가 없다고 할 정도로 거칠었지만, 졸라는 세련된 매너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예술과 사회의 개혁에 대해서는 동지였다. 특히 파리코뮌을 겪은 직후 졸라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 정도로 희망에 불타고,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 우리들의 시대가 찾아온 거야.”(1871.7.4. 편지)라고 세잔에게 외친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진보의 물결 속에서 예술 창조에 매진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세잔은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보수화한 반면, 졸라는 죽을 때까지 진보적이었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더 진보적으로 되었다. 젊은 시절에 반교회주의자였던 세잔은 50세를 전후하여 가톨릭 민족주의자로 바뀌었지만, 졸라는 무신론 사회주의자로 평생을 살면서 사회 개혁을 위해 싸웠다. 세잔이 변한 뒤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세잔이 그렇게 보수화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본래 시골 사람인 그는 고향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곳 사람들의 보수성에 익숙했다. 게다가 죽기 직전까지 성공하지 못한 점에 대한 좌절이 그를 고향과 가톨릭으로 이끌었을 수 있다. 충분히 이해되는 점이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잘하고 못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삶이 그렇게 귀결되는 것일 뿐이다. 그 뒤 두 사람은 20년 정도 서로 미워하고 섭섭해하고 울분을 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좋아하면서도 질투하고 경쟁했고, 서로 걱정하고 격려하면서도 미워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사십 대 후반까지는 꾸준히 만났다. 애정은 물론 우정도 그런 거니까. 한결같은 사랑이란 불변의 사랑이 아니라 변화의 사랑이니까.
---「세잔과 졸라의 브로맨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