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쓰기에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면, 글쓰기로 사랑의 격정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물론 그 바탕은 다르지만. 나의 목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감당해야 할 위험이고, 거기엔 낙원과 지옥이 나란히 공존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고통과 더 큰 고통만이 있는 것 같다.
--- p.19, 「서문: 오아시스라는 착각」 중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도록 체계적으로 사회화하고 교육하며 동시에 이성애 명령을 우리에게 폭격하듯 쏟아붓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병적인 도착증이다. 교묘하지 않은가? 각 젠더의 대본에 문자 그대로 부합하는 파트너들은 무척 불행해질 확률이 높다. 그 대본은 한쪽에는 전제적 요구에 따라 애정과 사랑의 영역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감상적이며 의존적인 피조물을 낳고, 다른 한쪽에는 야성적 독립성이라는 허상 속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채 말 없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꺽다리 남자를 낳는데, 이 남자는 어떤 비극적인 부주의로 자신이 그 덫에 걸려든 게 아닌지 늘 자문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더라도 그 요소들은 우리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고, 그것들은 문제가 되는 간섭들을 낳는다.
--- p.21, 「서문: 오아시스라는 착각」 중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남편인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내 마음에 묶여 있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나의 팔꿈치 아래에 항상 끼고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각자 아파트를 세냈다. 크리스티나 네링은 전한다. “그들은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청소년처럼 저녁 식사와 만남 시간을 조정했다. 어쨌든 이렇게 선택된 거리는 그들의 관계를 청소년의 관계로 만들기는커녕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어져 있게 해주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도 같은 선택을 했다. “그들은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별개의 집 두 채(칼로는 파란 집, 리베라는 분홍색 집)에서 살았는데, 두 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 갇힌 수십 마리 동물, 과일나무, 드문드문 보이는 사막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 p.62, 「프롤로그: 순응주의와 허무주의 사이에서」 중에서
대중문화는 결혼에 대한 전망 속에 현실을 날것 그대로 제시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유명한 로맨틱 코미디 〈러브 액츄얼리〉(2003)는 이별 후 프랑스 남부의 자기 집에 은둔해서 지내는 런던 출신 작가 제이미와 포르투갈 출신 여자 가정부 오렐리아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가정 착취의 낭만화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를 내놓는다. 두 주인공 모두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제이미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충동적으로 마르세유행 비행기에 올라타고, 그녀가 종업원으로 일하는 카페로 찾아가 그녀를 만난다. 대단히 극적인 이 장면에서 그는 계단 위에 선 그녀에게 카페 손님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혼한다. 이때 우리는 그들이 헤어져 있는 동안 각자 상대의 언어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십중팔구 오렐리아는 제이미에게 예전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집을 관리하고,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커피를 가져다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동거를 거부하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지 아니면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 때문에 사랑받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 p.70, 「프롤로그: 순응주의와 허무주의 사이에서」 중에서
우리의 문화는 여성비하를 표준화해왔기 때문에 많은 남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검열을 하지 않거나 스스로 작아지지 않는 반려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일부 남성은 상당히 호기심을, 열린 정신을, 자신감을 드러내며 그런 여성을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찾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위험을 부담하는 일이다. 여성은 ‘스스로 작아지길’ 거부하며 남성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빨리 드러내도록 부추김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만일 그가 도망치더라도 큰 상실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남자는 위험을 의미한다. ‘이상적인’ 여성을 둘러싼 환상에 가려졌던 천박하고 압제적인 논리가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 p.125, 「1장: 사랑받으려면 ‘스스로 작아져야’ 하나?」 중에서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은 무고할 때조차 자신이 죄인이라고 설득당한다. 그리고 죄지은 남성은 자신에게 무엇이든 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데 익숙해져서, 자신이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을 때는 언제나 자신이 무고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가해자들은 법정에 소환되어서도 종종 반려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응수한다. 여성에게 주입된 기계적인 위법성의 감정은 무엇을 하든 자신은 온당한 권리 안에 있다고 느끼는 남성의 감정과 호응한다.
--- p.140, 「2장: 남자, 진짜 남자」 중에서
이는 거의 우리 사회에 대한 음산한 풍자 같다. 해골들이 가부장제의 벽장 속에서 덜거덕거리는 동안 우리는 로맨틱 코미디에 심취하는 꼴이다.
--- p.175, 「2장: 남자, 진짜 남자」 중에서
《단순한 열정》이 완벽하게 예시하는 여성의 사랑 방식은 이미 내게 아주 친근했다. 지금 그 방식은 나를 겁에 질리게 하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숭고하게 여겨졌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매우 잘 묘사하고 있는 이러한 퇴색에서, 사랑받는 존재와 관계된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런 포기에서 문제를 보지 못했다.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그와 관계되지 않은 모든 것, 그의 호의와 관계되지 않은 모든 것을 싫어하는 일이 자연스럽고, 심지어 부러운 일처럼 보였다. 나는 평범하고 음울한 현실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해줄, 있을 법하지 않은 구원자를 기다리는 일 대신, 내 삶의 모든 면면에 색을 입히고, 그것들을 길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몫임을 알지 못했다. 나는 나를 건설하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알지 못했다. 어떤 영화, 어떤 소설도 내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듣지 못했거나.
--- p.196, 「3장: 사원을 지키는 여자들」 중에서
엉겁결에 나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성의 역할 속에 눌러앉았다. 페넬로프 러시아노프의 말을 빌리자면 그 태도는 “언제나 감탄스럽고 심지어 매혹적이기도 한 여성의 속성처럼 생각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되기”에 그만큼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 p.218, 「3장: 사원을 지키는 여자들」 중에서
내면화된 전제적 시선에서 일부 여성들이 해방되는 데 시동을 건 두 번째 사건은 코로나 유행병으로 인한 2020년 봄의 격리다. 평소에 시선과 판단의 선별기가 되었던 사회적 환경에서 갑자기 벗어나게 된 여성은 자신의 감각에 다시 집중하게 되었다. 일부 여성은 이 기회에 화장과 염색을 끊고 지내면서 훨씬 자연스러운 자신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저널리스트 아니야 다스는 말한다. “화장하지 않고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은 화장품이나 머리카락 관리에서 실질적 절약을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매일 자유로운 시간까지 벌었다.” 많은 여성이 편한 옷을 선호했는데, 특히 브래지어를 벗고, 조깅 팬츠를 선택하면서 평소 차림보다 몸이 더 편히 숨을 쉬게 되었다. 기자인 미리암 르뱅은 말했다. “보아하니 대개의 여성이 처음 벗어던진 것은 꽉 끼는 청바지와 자꾸 말려 올라가는 치마였다.”
--- p.278, 「4장: 위대한 탈소유」 중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썼을 때조차 여자는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억눌리고, 주변에서 과소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경우가 보여준다. 도미니크 오리의 대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갈리마르에서 1999년에 출간한 1988년의 대담에서 대담자는 그녀에게 거의 폴랑(그가 위대한 편집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상적인 작품을 남긴 건 없다)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25년 동안 갈리마르의 기획위원회에서 유일한 여자였기에 살면서 가깝게 지낸 다른 모든 위대한 남자들에 대해서만 물었다.
--- p.306, 「4장: 위대한 탈소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