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은 디자인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성공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아이디어, 가치, 원칙 등, 그 브랜드만의 철학과 문화 위에서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다듬어진다. 브랜드를 둘러싼 여러 겹들 중 디자인은 가장 바깥쪽을 둘러싼 겹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디자인은 브랜드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경쟁 PT는 불꽃 튀기는 경쟁에서 우열을 가려내는 과정도, 프로젝트에 적합한 회사를 찾는 과정도 아니다. 그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하고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클라이언트에 대해 클라이언트보다 더 연구하고 더 잘 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무조건 “예”라고 답하지 않는다.
디자인은 예기치 못한 변수와 변화를 받아들이며 정답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쏟아지는 수많은 변수들 중에는 클라이언트의 판단과 의지도 포함된다.
클라이언트들이 우리를 믿고 맡길 때 서로간의 신뢰가 바탕이 된 작업은 결과 역시 좋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디자인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좋은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한다.
모든 디자인 시안과 결과물에는 목적과 이유가 분명해야 하고 “Why?”라는 질문을 던질 때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Why?”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디자인, 다시 말해 목적이 불분명한 디자인은 쓸모없는 장식일 뿐이다.
컨셉을 만들어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디자인의 힘이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글쓰기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초기에는 많은 생각과 많은 내용이 담기지만 시간을 두고 숙성의 시간을 거치면 꼭 필요한 것만 남게 된다.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왜 이런 형태가, 왜 이 컬러가 나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을 구하는 과정이 논리이다.
논리적인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은 상대를 설득하고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돕는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아이덴티티란 컨셉이 명확한 자기다움,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브랜드나 회사를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다.
디자인은 경영을 위한 수단일 뿐, 디자인 자체가 브랜드나 제품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즈니스를 잘하는 회사, 질 좋은 제품을 끊임없이 연구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려는 회사, 안목 있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갖춘 회사에 안목 있는 디자인이 수반되었을 때 전략적 무기로서 디자인 파워가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 사이에선 서체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 굳이 전용서체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데 전용서체를 만드는 경우도 보인다. 기존 서체 중에 훌륭한 서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몇몇 대기업들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전용서체 개발에 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는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서체 중 브랜드나 기업의 이미지에 맞는 서체를 잘 선택해 지정서체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나 리뉴얼 작업을 진행할 때 로고, 서체, 컬러 못지않게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요소를 우리는 포스 엘리먼트(4th Element)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네 번째 요소이다. …… 포스 엘리먼트(4th Element)란 로고, 서체, 컬러를 제외한 모든 시각적 요소를 총칭한다. 즉 그래픽 모티프, 패턴 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포스 엘리먼트는 로고 등의 다른 요소와 같이 사용될 수도 있고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드는 디자인을 디자인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기초적이며 논리적인 시스템이다.
축구 경기에 그라운드가 정해져 있지 않고 오프사이드 기준이 없다면 정말 뻔하고 지루한 경기가 될 것이다. 축구 경기에서 이러한 제한이 창조적인 게임을 만든다. 그리드란 이러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카드가 전용서체 개발 덕분에 브랜드의 가치 상승이나 비즈니스에서 특별한 혜택을 봤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출발점은 엄연히 다르다. 현대카드는 심볼이나 로고 대신 서체로 CI를 만들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와 논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체 중에서도 디스플레이 서체를 개발한 것이다.
늘 광고와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탄 까닭에 현대카드의 강점이기도 한 경영 전략적인 측면은 가려져 있곤 했지만 고객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에 바탕을 둔 경영 철학이 어느 한 곳에 치중되지 않고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디자인 파워에 날개를 달아 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저런 제약 사항들이 많아서 디자인하기가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생각 자체가 디자인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어차피 한계를 갖고 시작하는 것이다.
제작할 때 돈을 많이 들이면 분명 좋은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디자인을 완성하는 것은 비용이 아니다.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 또한 디자이너의 역량이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제작 단가를 낮추면서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중요한 고려사항이라고 하겠다.
현대카드는 카드 서비스로만 고객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해 왔다.
현대카드는 자신들을 단순한 카드회사나 금융회사로 규정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고객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기업으로 규정하고 ‘고객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현대카드가 고객에게 새로운 몰입과 영감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픽토그램의 경우 그림이면서 문자로 기능하기도 하고, 고객의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언어를 초월하여 만국 공용어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재력이 큰 아이덴티티의 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유행을 타는 디자인은 브랜드 정체성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다루는 디자이너가 원칙을 잊고 새로운 흐름에 휘둘리면서 온갖 트렌드를 브랜드에 반영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아이덴티티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너무 많은 디자인 요소를 한순간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정체성이 강화되기보다 희석된다. 현대카드 애뉴얼 리포트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8년간 같은 판형을 고수해왔던 것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 회사나 개인이 만드는 디자인 결과물이 국가 또는 사회의 유산을 뜻하는 헤리티지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크래프트맨십이라고 생각한다. ‘장인정신’이라고 치환해서 말하기엔 조심스럽다. 디테일에 대한 자기강박,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감, 격(class)이 느껴질 정도의 완성도 추구, 동료 디자이너 간의 완벽한 결속력과 신뢰감을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쌓게 하는 페어플레이 정신,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스스로의 작업에 가치를 부여하는 원동력이 되는 존중과 자존심(respect & pride).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질 때 크래프트맨십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문제 해결을 통한 창조의 작업이다. 디자이너라면 ‘실천적 이상주의자’로서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의미 있는 디자인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상(理想)은 우물 밖의 하늘에 두고 몸은 그 좁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의 격을 높이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며, 실천적 이상주의자가 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조건이다. 우리는 그런 경험과 이상을 같이 가진 자만이 항상 창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클래스’, ‘격’은 격의 주체가 되는 대상의 상상력과 그 대상 외부에 놓인 세상에 대한 현실적 구분, 그것을 뛰어넘는 적절한 노력이 있을 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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