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힘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라는 말이 교회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듯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때문이라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동의합니다. 이 사조는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종교적으로는 절대 진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부정한다고 부정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 내부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절대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힘이 없고 성도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사람들은 말하기는 좋아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말하기 훈련을 하기 전에 반드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야고보서 1장 19절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기만 해도 인간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상담의 제1원리는 경청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자기 스스로 결론을 다 내리고 털어놓고 나서 “시원하다.”라고 말하며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르치려 하고, 훈계하려고 하면 기분이 나빠 마음을 열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듣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말을 들어 줄 때 성공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 pp.27-28
좋은 글을 보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이 취미로 끝나면 안 됩니다. 취미를 뛰어 넘어 그 말씀을 곱씹어 실행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4:17).
한국의 기독교가 열심히 모여 예배하고, 날마다 말씀을 듣는데 세상을 향한 영향력은 점점 떨어집니까? 그것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 속에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시온성이 나오고, 소원의 항구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p.32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신 비유 중에서 해석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비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악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청지기는 교활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전 재산을 관리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청지기는 횡령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빚진 자들도 청지기 못지않게 교활했습니다. 그들은 임대료를 빚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임대료는 현금이 아닌 현물로 지불되었습니다. 청지기는 자기가 해고될 것을 알게 되자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이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기록해 주었습니다.
악한 청지기는 두 가지 효과를 노렸을 것입니다. 빚진 자들이 그에게 고맙게 생각할 것과 자기 자신의 비행에 그들을 공범자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 해도 어느 정도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된 주인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놀라거나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탄을 하고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청지기와 같이 마음이 삐뚤어지고 악한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지혜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들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 pp.47-48
솔로몬이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왕국을 통치하고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 그리고 전쟁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으며,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음을 알고 그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한 사람을 인사 잘하고, 친절하고, 머리를 잘 숙이는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겸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고, 솔로몬같이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 p.76
세상 사람들은 강한 것이 이기고 오래 간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혀와 치아를 비교해 보십시오. 부드러운 혀가 딱딱한 치아보다 훨씬 오래 갑니다. 잠언 25장 15절에서는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라고 말합니다. 물방울은 부드러우나 계속 떨어지면 돌을 뚫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약한 사람 같으나 강한 사람입니다. 강한 사람은 충돌하고, 부러지고, 상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감싸고, 덮어 주고, 위로자가 됩니다.
세상에 생명이 왕성한 것은 모두 부드럽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진 시체는 한 시간만 지나면 돌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부드러운 것에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틀렸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요한도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한 성질 하는 것으로 유명한 모세도 ‘온유함이 세상 사람들 중에 최고’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 pp.95-96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보여 주신 기적은 갈릴리 가나 결혼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왜 하필이면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결혼식은 기쁨의 자리입니다. 기쁨의 자리여야 할 결혼식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기쁨 대신 근심과 걱정이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에덴동산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란 놈이 그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것을 되찾아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온 천하에 선포하신 것이 결혼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새신랑 되시고 새 술이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인류의 새 술이 되시고 신랑이 되시는 예수 안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며 살기 바랍니다.
--- p.155
우리는 보통 교회가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교회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으로서 우주 창조로부터 암시되고, 구약시대를 통해 여러 모양, 즉 노아의 방주, 광야, 성전 그리고 회당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보다 더 나은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완전한 교회는 세상 종말과 함께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교회와 교역자는 은총의 유효한 수단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힘을 부여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마귀의 권세, 세상의 악한 세력을 물리칠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수를 증거할 때,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 p.164
여기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 끝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교회의 사명은 ‘예배와 전도’입니다. 이를 위해 교육도 하고 친교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5대 본질(예배, 전도, 교육, 봉사, 친교) 혹은 사명이 있는데, 항상 예배와 전도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이 본질적 사명인 전도에 대해 부담을 갖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단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쉬운 것이 없습니다. 쉬운 것은 부탁하지 명령하지 않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에 복종하면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전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에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 p.207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성령을 부어 주시면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노인들이 꿈을 꾸는 비전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실히 믿습니다. 꿈은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 모두 꿈쟁이가 됩시다. 요셉과 같이 꿈꾸는 자가 됩시다. 비난과 시기와 미움과 같은 시련을 극복하고 꿈을 선포하며 나아갑시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고 냇물이 흘러 강물이 되고 강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