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가 염두에 두어야 할 두 가지 근본 대상은 ‘성경 말씀’과 ‘듣는 사람’이다. 밀을 추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준비하지 않으면, 양분을 공급할 수도 기쁨을 줄 수도 없다. 이렇게 건강한 설교는 두 가지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인데, 양쪽 모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보여 주고픈 열망이 솟아나게 하는 원천이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듣는 이의 마음을 여실 수 있음이 분명하지만, 전하는 자도 진리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듣는 이의 마음과 삶에 깊숙이 새겨지게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p.27~28
바울은 각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여, 각 문화의 우상이었던 헬라인들의 ‘지적인 오만’과 유대인들의 ‘행위에 기초한 의로움’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최고의 가치와 선함을 추구해 온 방식이 사실은 죄악되고 자기파괴적이었음을 일깨운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활동이나 약삭빠른 수사학적 전략이 아니다. 다름 아닌 사랑과 돌봄의 행위다. 우리는 사회 문화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내면 동기들은 우리가 속한 인간 공동체에 의해 깊숙하게 형성된다. 성경 본문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그 문화의 근본 신념들(그 안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보인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이 순간이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 p.34~35
어떤 설교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일러 주고 그 원리를 복음의 맥락 안에 연계시키지 않는 것은, 자칫 열심히만 하면 스스로 감당할 만큼 충분히 완벽해질 수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우리가 ‘특정한’ 성경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것을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이야기 안에서 설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말씀의 의미를 사실상 변질시킨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초청보다 ‘더 열심히 하라’라는 도덕적 권면이 되어 버린다. 결국 성경을 읽는 데는 단 두 가지 길이 있다. ‘근본적으로 나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인가?’ 다른 말로, ‘근본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그분이 행하신 일에 관한 것인가?’
--- p.84
구약학 교수인 트램퍼 롱맨이 한번은 나한테 말하길, 성경을 읽는 것은 마치 영화 [식스 센스]를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 영화는 엔딩이 굉장히 놀라운데, 우리가 앞서 본 장면으로 되돌아가 모든 것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두 번째 볼 때는, 영화의 처음과 중간을 볼 때도 마지막 엔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엔딩이 앞서 지나간 모든 장면에 무시할 수 없는 빛을 드리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야기의 모든 맥락이, 모든 주제의 모든 절정이 그리스도께로 수렴된다는 걸 안다면, 당신은 모든 성경 본문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당신은 무조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이 딱히 메시아 예언이나 그리스도를 전조하는 주요 인물 혹은 통정경적인 주제, 핵심적인 성경 이미지나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제 당신은 그분을 볼 수밖에 없다.
--- p.119
바울은 청중의 올바른 신념을 취하여, 성경의 빛 안에서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비판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 자신의 전제의 잣대에도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사랑하면서 동시에 대항하기 위해 적응한다. 사람들의 좋은 충동을 긍정함으로써, 발견되는 통찰들을 승인함으로써,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추론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바울은 단지 그들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존중한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상황화한다. 그는 좋은 소식은 전면에 내세우고 나쁜 소식은 뒤로 미루는 식이 아니라, 긍정(confirmation)과 대항(confrontation)을 뒤섞음으로써 듣는 이들이 그들의 마음과 가슴에 호소하는 말씀의 능력을 회피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써 우리는 문화에 적응할지 아니면 대항할지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발견한다. 답은 ‘둘 다 조금씩’이나 모종의 얼치기 대답이 아니다. 우리가 문화에 적응하고 상황화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동시에 문화에 맞서기 위해서다.
--- p.137~138
정보만 던져 주는 설교는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무얼 해야 할지를 일러 줄 수 있다. 반면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는, 다시 말해 내 직업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의 환호나 내 독립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는, 청중들을 바로 그 자리에서 변화시킨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람들이 자기 설교를 받아쓰는 것을 늘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받아쓰기는 강의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설교자의 책무는 지식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로이드 존스와 에드워즈는 설교가 청중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겨야 하고, 그것이 “정보 전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나로선 청중이 설교의 전반부를 받아쓰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설교 끝부분에 가서도 여전히 받아쓰고 있다면, 우리가 그들의 정감을 만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 p.223
설교단이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려는 유혹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이 우리를 설교단으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기보다 설교자로서의 삶을 더욱 힘써 준비하라.
---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