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 전인데 왜 남편이라고 불렸나요? (1:18-25)
이스라엘 전통에서 약혼은 결혼과 같은 법적 효력을 가졌다. 유대인 남성은 대개 18세에 결혼했으며, 소녀들은 대개 열두 살 무렵에 약혼했다고 전해진다. 약혼과 결혼에는 세 가지 의무사항에 대한 관례가 확립되어야 했는데, 첫째, 신랑의 가족은 신부에게 일종의 보상 차원에서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참조. 창 34:12). 이는 단지 금전적 지불이 아니라 두 가문을 결속시키는 행위였다. 둘째,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나 신랑에게 결혼지참금을 제공했는데, 새 가정을 시작케 하는 선물이었다(참조. 창 24:59). 셋째, 신랑은 신부에게 헌신의 상징으로 선물을 했다(참조. 창 24:53).
약혼은 결혼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가지므로 약혼도 이혼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로 파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약혼했다고 바로 신랑의 집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고, 대개 약혼과 결혼 사이에는 1년의 시간이 있었으며, 그런 다음에야 동거할 수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동거하기 전이었다고 말하는 마태복음 1:18은 이 과정의 거의 마지막 단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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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님의 멍에는 과연 가볍고 쉬울까요? (11:25-30)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에게서 배우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그분의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에 그렇다. 멍에는 유대교와 신약성경에서 율법에 대한 은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가?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가볍고 쉽다는 말은 예수님이 권고하는 제자의 길이 쉽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는 의를 요구하셨고 (5:20), 철저한 헌신과 자기 부정을 제자의 길로 제시하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가혹하리만치 세세한 율법 조항을 제시하여 당시 사람들을 숨 막히게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에 담긴 진정한 생명의 의미를 가르치시므로 제자들로 하여금 자발적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셨고, 그들이 택한 좁은 길의 순종이 참 안식으로 이어진다고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굽은 등에서 짐을 내려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이때 쉼은 수고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때 찾아오는 보람과 참 평강이다(참조. 렘 6:16).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는 평강을 얻게 되어 있다. 또한 현재에도 순종 후에 오는 기쁨을 누리겠지만, 종말적 의미에서 히브리서 3:7-4:6에 나오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이 쉼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순종의 수고로움을 통해 자신의 수고를 능가하는 참 안식을 누렸다. 앞으로도 많은 신앙인들이 그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멍에는 의무가 아닌 사랑의 멍에이며 ‘복음 안에서 자발적 순종이다.’ 사람들을 구속하는 의무가 아니다. 순종으로 짐을 지기에 더 큰 평강과 평안이 찾아오는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지 않겠는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말씀은 한편으로 예수님이 먼저 그 멍에를 지신 당사자임을 의미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멍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두 마리의 소에 얹어져 두 마리의 소가 한 팀으로 일하게 하는 도구였다고 한다. 이때 능력이 뛰어난 소가 서툰 소를 리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와 팀이 되어 멍에를 매자꾸나. 그리고 내 옆에서 내가 짐을 어떻게 끄는지를 지켜보며 배우라. 내가 널 도와주면 너의 짐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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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만점 메시지
첫째, 우리는 주님의 필요를 살피는 심정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살펴야 한다.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유가 온전히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되, 어쩔 수 없이 내놓기보다 주님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 자발적으로 내어놓는 헌신이 필요하다.
둘째,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요즘 자꾸만 모든 것을 내 안으로, 내 안으로 끌어모으기 쉽다. 그러나 주님은 힘든 시기에도 우리의 시선을 다른 사람을 향해서 돌리라 말씀하신다. 언젠가 주님이 허락하신 물질을 주님의 이름으로 쓰겠다 했으나 여러 구실과 형편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필요하나 이 적은 물질이 다른 이에게 주어진다면 더욱 가치를 발할 그 일은 없는가? “주께서 쓰시겠다” “주께서 필요하시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 그 일을 미루지 말고 기꺼이 감당하는 헌신이 요청된다.
셋째, 성전 정화 사건은 모양만 있고 예배와 경건이 사라져 버린 성전을 고발하고 있다.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어떠한가(고전 3:16; 롬 12:1)? 내 삶의 주된 목적이 내 욕심을 채우는 데 있다면, 우리 몸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일 수 있다. 우리의 몸과 심령은 하나님이 머무시길 기뻐하는 성전인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언행과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에너지로 드리는 산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는가?
넷째,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모두 열매를 강조한다. 맏아들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남발하지만, 정작 주께서 찾으실 때는 우리 손에 아무런 순종의 열매가 없지는 않은가? 우리는 차라리 싫다고 거절한 작은아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뉘우치고 순종했다는 사실이다. 머뭇거리며 아직도 맺지 못한 순종의 열매는 무엇인가?
어느 책에서 ‘용기’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정의를 내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용기는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야 할 당위성을 알지만 아직 하지 않고 있는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용기 내어 우리가 미루었으나 주님이 기뻐하실 그 일을 지금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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