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년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었다. 태어남이라든가 만남이라든가 싫증이라든가 넌더리라든가 이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미움과 노여움과 그리움이나 시시함, 그런 모든 것이 긴 장마철에 한무리씩 다가오던 끝없는 구름의 행렬처럼 차례로 스쳐 지나왔다.
기록영화에서 보았듯이 꽃봉오리가 움트로 꽃잎이 나오고 피어나고 활짝 피어나고 더 활짝 피어나 젖혀지면서 끝에서부터 시들어 움츠러들고 드디어는 차례로 말라 떨어져 가지 끝에 간신히 붙은 꽃잎 하나 흐느적이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나부껴 떨어지는 광경, 그리고 필름은 거꾸로 돌아가며 다시 환원된다. 이 모든 출발들은 매순간 새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세기말의 그림들처럼 불안하다. 이별또한 새로운 출발이 될테니까.
--- p.210-211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p.
오래전에 불경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정이 맺혔던 부분들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대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가요, 여보
--- p.39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검붉은 색깔의 어린 장미가 가까이서 눈에 띄는데 아,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 책 도입부분 <베르톨트 브레히트>
당신은 그곳을 찾았나요? 윤희가 내게 묻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오. 라고 나는 대답할것이다. 인가를 찾아서 산을 넘고 언덕을 내려오는 중이라고. 멀리 마을의 불빛이며 연기나는 굴뚝이 보인다고. 당신이 살고 겪어온 길을 따라서 나는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고. 나는 젊은 내 얼굴 뒤편에 떠오른 그네의 눈길 이쪽에 서서 중얼거렸다. 다녀올게.
---오래된 정원(하) p.312
나는 오후 늦게야 깨어났고 가족들이 권하는 음식들을 함가기씩 맛보았다. 양념의 맛은 나에게는 너무 진하고 생소했다. 그들은 내게 어느 정도 조심하면서 내 기분이 안락한다를 알아내려고 했다. 나는 긴말로 대답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답형이 되어버렸다. 맛있니, 네. 피곤하니. 아뇨. 하는 식이었다. 미국에 이민간 아우와 긴 통화를 했는데 그는 주로 자기 가족과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나는 듣기만 했다. 이모는 불쑥 엄니의 마지막 소원이었다면서 나의 결혼문제를 꺼냈는데 누님이 만류해서 겨우 대답을 피할수 가 있었다.
--- p.25
나는 언젠가 친구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 시대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라고 절망적으로 외쳤던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요새 와서 나는 이 말을 수정할 작정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때에나 사람들은 사랑을 했어요. 세상에 드러나는 모양이 시대마다 다르기는 했어도. 물살에 씻기어 닳아지고부서지는 돌멩이처럼 일상에 시달리는 벗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회한에 잠기지 않기를 바래요. 지금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풍요로운 인생의 깊이를 존중하라고. 그리고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지난날과 미래를 껴안게 될 것을 기대하구 있어요.
--- pp.303-304
그러나 나와 내 벗들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우리가 겪은 일들을 미래나 예견에 사로잡힌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끌어내오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으로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제는 시대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헤엄쳐가던 하찮고 가냘픈 개인의 나날을 통해서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투로 얘기하자면 『오래된 정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출발할 것이다.
--- 저자 후기
가까이서는 안 보이던 옥사건물들이 층을 이루어 언덕 위에 서 있는 게 보였어요. 올 때는 무심코 넘겨서 보이지 않던 옥사의 작은 창들이 어딘가에서 당신이 내다볼 것만 같아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흰 벽의 검은 창들은 무슨 예쁜 하모니카처럼 보였어요. 그렇지만 입을 대고 불면 나직하고 무겁게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저음만 날 것 같이. 그건 또 어떤 벌레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아. 자세히 보면 그 창턱 아래 무언가 울긋불긋한 색깔이 보이는 거예요.
--- p.
[...] 하지만 눈을 뜨고 자세히 둘러보면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중이어요. 풀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가는 바람에는 포르르, 잔바람에는 살랑살랑, 거센 바람에는 휘청휘청 눕거나 펄럭이거나 몸부림을 치지요. 풍경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가 그냥 고여있는 듯한 정적 가운데서도 느닷없이 풀숲으로부터 메뚜기나 방아깨비 한마리가 포르르 날아 길 건너편으로 가로질러가요. 개구리가 논두렁에서 물속으로 퐁당 뛰어들기도 하구요. 갈뫼의 여름은 살아있는 것들의 대합창이 연주되고 있는 듯 했지요. [...]
--- p.227
[...] 하지만 눈을 뜨고 자세히 둘러보면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중이어요. 풀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가는 바람에는 포르르, 잔바람에는 살랑살랑, 거센 바람에는 휘청휘청 눕거나 펄럭이거나 몸부림을 치지요. 풍경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가 그냥 고여있는 듯한 정적 가운데서도 느닷없이 풀숲으로부터 메뚜기나 방아깨비 한마리가 포르르 날아 길 건너편으로 가로질러가요. 개구리가 논두렁에서 물속으로 퐁당 뛰어들기도 하구요. 갈뫼의 여름은 살아있는 것들의 대합창이 연주되고 있는 듯 했지요. [...]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