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보니 클래식 음악과의 이러한 사귐을 어려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음악 듣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대단한 행운을 누린 셈이다. 어린이들에게도 이 행운을 나눠 준다면, 마스크를 쓰느라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해도,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지 못해도 감정만은 메마르지 않도록 돕는 게 될 성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와 클래식의 사귐도 이름 알기, 친해지기, 넓어지기, 깊어지기의 네 굽이를 거치며 풍성해졌다. 하지만 나 혼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면 어린이 시절 클래식을 알려준 내 스승의 ‘비법’을 여기 한번 풀어보면 어떨까?
---「프롤로그 · 눈치보기 혹은 기웃거리기」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영어와 에세이 쓰기에는 그토록 공을 들였으면서도 춤이나 클래식을 가르쳐 본 적은 전혀 없다. 애석한 일이다. 한 사람이 멋져 보일 수 있는 아주 요긴한 방법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세계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미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클래식이나 춤을 비롯한 예술은 단기간에 외워서 익힐 수가 없다는 점이다. 벼락치기하면 다 티가 나고, 필요성을 느껴서 배우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막막하다. 앞에서 말한 그 교수님도 그 점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한다. 예술은 오랜 시간 몸과 마음에 익혀야 자연스럽다.
---「프롤로그 · 눈치보기 혹은 기웃거리기」 중에서
클래식 음악이란 대부분 유행을 넘어 오래 살아남은 음악이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본래 음악은 잊히기 쉽다.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후대의 사람들을 계속 매료해야 한다. 악보에 적힌 그 순간을 연주로 불러내려는 사람들이 세대를 거듭하여 나와야 하고 그렇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터를 잡아야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망각의 시간과 겨루어 제 존재를 증명하는 일과 같다. 바흐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제고 진실한 울림과 한 번 인생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너른 지향을 품고 있었기에 잠깐의 여흥을 넘어 ‘고전’이 될 수 있었다.
---「프롤로그 · 눈치보기 혹은 기웃거리기」 중에서
클래식 음악은 여러 겹의 존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음악이다. ‘제대로 하려는’ 장인의 정신, 작곡가의 생각을 더 앞세우려는 겸양의 정신, 전통과 기록을 존중하려는 학구의 정신 등이 작품만큼이나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다. 진정한 품위는 명품이나 값비싼 물건에 있지 않다. 귀 기울여 듣는 법에 있다. 클래식 음악은 경청과 존중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다. 경탄의 귀재 어린이의 품위를 북돋아 줄 수 있게 우리 어른들도 귀를 열어두자.
---「프롤로그 · 눈치보기 혹은 기웃거리기」 중에서
그러니, 아이들아, 마음껏 좋아해라! 무엇이든 좋다! 무엇이든 힘껏 좋아하는 너희들이 진짜 너희들이다! 좋아하고 사랑할 때 어떤 놀라운 힘이 너희 안에서 샘솟는지를 꼭 겪어보고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할 기회는, 한번 같이 만들어보자!
---「Ⅰ 이름 알기 · 어쩌다 알게 된 클래식」 중에서
어린이에게 클래식이 어렵지 않느냐는 생각은 어른들의 편견에 가깝다. 아홉 살 때 클래식을 처음 들은 나는 어려운 줄 전혀 몰랐다. 그냥 삼촌이 좋았고, 멋있어서 음악도 따라 들었을 뿐이다. 삼촌도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가령 쇤베르크는 어렵다거나, 베토벤은 푸르트벵글러가 최고라거나 하는 말씀은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Ⅰ 이름 알기 · 어쩌다 알게 된 클래식」 중에서
듣기란 어린이들에게는 이미 특기다. 들으면 여전히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 이렇게 듣는 것이 특기인데 클래식이 어려울 거라고? 그럴 리 없다. 사랑할 기회를 주기만 하면, 어린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응답할 것이다.
---「Ⅰ 이름 알기 · 어쩌다 알게 된 클래식」 중에서
어린이가 음악 듣기를 배우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단지 음악을 아는 것을 넘어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경청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을 기르며, 더 넓게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귀한 기회를 제공해 준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반복하지만,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존중의 표현이다!
---「Ⅰ 이름 알기 · 어쩌다 알게 된 클래식」 중에서
시간을 버텨내는 힘. 음악이 가르쳐주었다. 내가 살아가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숱한 시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눈물겹게 소중하게 만들어주었다.
---「Ⅰ 이름 알기 · 어쩌다 알게 된 클래식」 중에서
클래식과 친해지는 일이란 결국 귀를 연결시키는 일이다. 사랑과 관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귀는 더 많은 것을 알아듣는다. 그때에야 귀는 클래식 음악과 친밀한 사귐을 시작한다. 백아의 농현에서 태산을 보았던 종자기처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에서 인간이라는 소우주를 보게 된다. 거기 솟은 산과 깊은 골짜기, 거기 흐르는 물길과 심연을 더듬기 시작한다. 아, 그것은 미처 몰랐던 세계 하나를 새로 얻는 행복이다.
---「Ⅱ 친해지기 · 악기와 오케스트라」 중에서
만일 그러한 협력이 성공한다면 작곡가가 악보에 기록해 둔 아름다운 순간이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 놀랍게 재현된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이상적인’ 사회의 상징이 될 만하다. 대화와 협력이라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얻어낸 ‘다양성 속의 조화로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무대 위의 한 반’ 오케스트라의 의의다.
---「Ⅱ 친해지기 · 악기와 오케스트라, 105쪽
장애가 있어서 할 수 없다고, 돈이 없으니 못 한다고 말하기 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는 그의 ‘음색’이, 그의 ‘높이’가, 그의 ‘진동’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자.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제발 개인의 의지로 극복하라고만 종용하지 말고 한계를 넘어 개성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 그럴 수 있도록 돕자. 어쩌면 그것이 ‘무대 위의 한 반’, 오케스트라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생각 거리일지도 모른다.
---「Ⅱ 친해지기 · 악기와 오케스트라」 중에서
음악은 기호가 아니라 소리다. 듣는 것이 먼저다. 음악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악보를 보는 것은 귀로 듣고 친해진 뒤에 시도해도 늦지 않다. 친해지고 사랑하게 되면 악보에도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순서가 잘못되어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음악과 담을 쌓게 되는지 모른다.
---「Ⅲ 넓어지기 · 나라들과 다양성」 중에서
우리가 클래식 음악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오랜 경험 때문이다. 신분의 차이, 학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를 넘어본 그 저력, 유럽의 민주시민 사회와 함께 발전하면서 관용적인 문화적 생태계를 가꿔온 그 정신 때문이다.
---「Ⅲ 넓어지기 · 나라들과 다양성」 중에서
내면성, 고백, 보통 사람의 존엄 등은 독일 특유의 음향적 이미지가 되었다. 겉치레보다는 내실, 잔재주보다는 오래 공들이는 장인정신 같은 독일 특유의 기풍과도 통한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정신을 작품 안에 담아 잊히지 않도록 했고, 이는 다시 독일 시민들에게 역경을 이기는 힘을 북돋아 주었다.
---「Ⅲ 넓어지기 · 나라들과 다양성」 중에서
음악은 연주될 때만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던가. 독일의 내면성이든, 프랑스의 에스프리든, 우리가 만난 나라들은 꼭 지키고픈 소중한 뜻을 음악에 담아 더욱 소중하게 만들었다. 거듭 부르고 연주하며 그 ‘사라질 아름다움’을 마음에 간직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사랑의 울림은 형형색색으로 제각각 반짝인다! 우리가 이 여행에서 얻은 보물은 저 다채로운 사랑의 울림이 아닐까!
---「Ⅲ 넓어지기 · 나라들과 다양성」 중에서
그렇게 나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를 악장별로 들었고, 작곡가들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바이올린 협주곡 모음집”, “피아노 협주곡 모음집”,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을 통해서 음악의 여러 장르에도 고유한 개성과 매력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듣는 시간이 길어졌고, 내 집중력도 늘어갔으며, 새로운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듣는 게 재미있어져서 한번 틀어놓으면 몇 십 분, 한 시간이 되었다. 어느새 클래식과 그만큼 친해진 것이다.
---「어린 감상자의 인터메초」 중에서
세상은 무채색 흑백사진이 아니고, 늘 빨갛고, 노랗고, 파랗지만도 않다. 이와 같이 감정도 그 세기와 온도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우리의 희로애락에는 칸막이가 없어서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기분이 늘 뒤섞인다. 완벽하게 선명한 기쁨, 100퍼센트 순전한 슬픔 같은 것은 한두 살 아기 때 느꼈던 원초적 감정이겠지만, 이미 성장한 우리에게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예술가는 세상을 본뜨고 또 영혼을 본떠 작품을 만들기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뒤섞이는 감정에 관심을 둔다. 마치 요리사가 단맛, 쓴맛, 매운맛, 고소한맛을 섞어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 양념을 만들어내듯이, 음악가도 감정들을 섞어 인생의 한순간을 말해주는 진실성과 깊이를 표현하려 한다. 그렇게 ‘영혼을 갈아 넣은’ 작품들에는 갖가지 감정이 진실에 가깝게 녹아 있다.
---「Ⅳ 깊어지기 · 감정과 감수성」 중에서
인류는 음악과 더불어 고통을 이겨왔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고된 노동을 하며 왜 노래를 불렀겠는가. 고통과 아픔은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나아진다는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 또한 다르지 않다. 저마다 내용은 달라도, 진실한 작품은 삶을 재료로 삼기에 고통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을 통과하여 만들어져 나온 예술 작품들은 감상자에게 크나큰 축복이 된다. 우리는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는데도 그 ‘불길’을 거치고 얻어낸 값진 보물을 ‘거의 공짜로’ 누리기 때문이다. 고통은 작품 안에서 흔적만 남아 듣는 이에게는 전혀 해롭지 않다. 오히려 더 깊어진 아름다움, 인생의 지혜가 전달될 뿐이다. 지금 시련의 어두운 길을 통과하는 중에 있는 이에게는 더없이 귀한 위안과 희망의 빛을 안겨준다.
---「Ⅳ 깊어지기 · 감정과 감수성」 중에서
음악에는 이렇게 사람을 끌어안는 힘이 있다. 공감의 능력이다. 나는 우리 어린이들이 꼭 이러한 공감의 마음을 배웠으면 좋겠다. 약자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키우고,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고 보면 우리는 다 연약하고, 다 결핍투성이다.
그런데 그간 약한 아이라고 괴롭히고, 없는 아이라고 무시하는 그런 비겁함을 어른들이 물려주었다. 평수 작은 아파트에 산다고, 연봉과 직책이 낮다고, 나와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판단하고 선을 긋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 것은 우리 어른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이 지면을 빌려 말하고 싶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아이들은 우리의 비겁함을 흉내 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결핍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도 우리 어른들이었다. 피할 수 있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감사한 일이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결핍은 결코 재앙이 아니다.
---「Ⅳ 깊어지기 · 감정과 감수성」 중에서
시간에서 자꾸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시간을 자꾸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시간에 맞춰서만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 숨에 맞게 늘리고 줄이고, 빨리 돌리기도 하고, 천천히 가게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비록 시계의 시간, 물리적인 시간은 늘 똑같이 째깍째깍 흘러가지만 사람은 이를 실로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 템포를 조절할 수 있는 활동, 예를 들어 책 읽기나 낭송, 기타 같은 악기를 스스로 연주하는 것 등은 ‘시간’의 경험을 조절하는 좋은 연습이 된다.
---「Ⅳ 깊어지기 · 감정과 감수성」 중에서
어떤 음악이기에 내 마음을 이렇게도 울리는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가. 견딜 수 없이 궁금해진다. 작곡가의 평전을 찾아 읽고, 어린이들이라면 훌륭한 음악가의 위인전을 읽게 된다.
그렇게 읽어나가다 보면 그들이 살아갔던 시대가 궁금해져서 읽기가 금방 음악사나 서양사로 뻗어나간다. 모차르트를 듣고 그의 전기를 읽다 보면 계몽주의의 시대상이 궁금해진다. 베토벤을 접하다 보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인연들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쇼팽과 들라크루아, 베토벤과 괴테가 서로 아는 사이였음을 발견할 때마다 유럽은 정말로 하나의 땅덩어리였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에필로그 · 머무르기」 중에서
예술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삶의 내용을 진실한 형식에 담아 인생보다 오래가도록 만든 것이다.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될까. 베토벤의 자유, 슈베르트의 진실한 자기 고백 같은 작품의 목소리도 기억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무수한 고통의 목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클래식 음악을 듣는 우리는 그러한 소외를 실행하거나 부추기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인싸나 아싸라는 말로 경계를 그어서도 안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의 불공평을 보고 화를 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팡틴과 코제트의 목소리가 주위에서 들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 인간적으로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욕심에 이끌려 혹은 자기 보호 본능과 불안 때문에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도록 우리 안에 여러분 안에 인간다움의 감수성과 민감성을 채워야 한다. 팡틴과 코제트의 용감한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려고 애를 써야 한다. 클래식을 듣거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다 이를 위해서다.
---「에필로그 · 머무르기」 중에서
하지만 그래도 슈베르트는 아침 7시부터 정오까지 쉼 없이 곡을 썼다. 슈베르트 곡이 몇 곡이나 되는지 아는가? 공식 목록에 있는 작품만 1,047개가 된다. 물론 천재였으니 가능했지만, 아무리 천재였어도, 좋아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슈베르트가 남긴 1,047개의 악보를 그냥 베끼는 데만도 25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이 곡들을 창작하는 데 1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도 물론 천재라서 그렇다. 하지만 천재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좋아하는 마음, 헌신하려는 열의에 있다. 그냥 베끼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데 시켜서 하는 사람이고, 슈베르트는 너무 좋아해서 늘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좋아해 보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중요한 경험이다. 재능을 틔워내는 놀라운 힘은 바로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 책의 말미에 이 이야기를 적는다.
---「에필로그 · 머무르기」 중에서
마지막으로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 하나를 여러분과 함께 듣고 싶다. 그가 남긴 천여 곡 중에서 딱 중간쯤 나온 작품, 「음악에게」라는 노래다. 슈베르트는 음악에게 말을 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저 네가 있어 참 감사하다’고. ‘네가 있어 어려운 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다’고.
나도 슈베르트의 음악에 똑같은 고백을 얹는다. 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낸 여러분도 곧 똑같이 행복한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에필로그 · 머무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