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는 권위적, 반민주적, 시대착오적이고 이기적이며, 한국의 진보는 경제와 대북관계에서 불안하다는 게 생활인들, 대다수 중산층의 불만이다. 그러니 한국 정치가 가야 할 길은 단순하다. 보수는 탈권위적이고, 민주적이며, 시대의 흐름에 민감해지고, 공공선의 의지가 강해져야 한다. 반면에 진보는 경제와 안보면에서 우리가 처한 글로벌 현실을 인식하고 국민들에게 좀 더 믿음과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 즉, 한국사회에는 ‘독재보수’, ‘이기적 보수’나 ‘불안한 진보’가 아닌 ‘민주보수’, ‘공적보수’나 ‘믿을 만한 진보’, ‘유능한 진보’가 필요하다.
그것이 양당의 혁신과제이다. 그리고 양당이 혁신과제를 구현하고 상대방의 혁신과제까지 포괄한다면 대단한 외연확장을 하는 것이다. 한국의 양당이 경쟁적으로 혁신하고 외연확장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라가 틀림없이 발전할 것이다. 그게 한국 정치에서 각 당이 가야 할 제3의길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권력을 잡을 때마다 매번 그 반대로만 가니 이해하기 힘들다. 때마다 혁신위, 비대위가 당에서 만들어지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길을 왜 못 가는 걸까?
--- p.18~19, 「여는 글」 중에서
끓어오르는 대중의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지배당했던 정권에서 검찰은 대중의 흥분을 자양분 삼아 적폐 청산의 칼을 휘두르고 스스로 영웅이 되어 팬덤을 형성하였다. 결국 검찰은 ‘권력
의 시녀’에서 ‘권력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단순한 검찰 출신이 아니라, 검찰 세력의 집권, 즉 검찰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한마디로 상명하복의 ‘신권위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다시 우리 사회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언론인, 학자 등 이른바 지성인들은 말과 글에 자기 검열을 하고, 기업인들은 세무조사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라졌던 관치금융이 본격화되었으며, 정치
인들은 자존감과 기개를 잃고 권력의 눈치를 보며 줄 서는 정치가 일상화되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지난 정권에서도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검찰 권력의 주도로 말이다. 언론은 본연의 취재와 비판보다 눈치 보며 권력을 찬양하는 이른바 ‘땡윤뉴스’로 가득하다.
--- p.58,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사법 활극이 판치는 나라」 중에서
둔촌 주공의 분양률이 낮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왜 우리 정부가 거기에 공공의 재원을 투입하고, 정부는 금융기관을 향해 대출하라고 촉구해야 하는 걸까? 미분양 아파트는 혈세로 매입하면서 왜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구제해 주지 않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왜 둔촌 주공만 매입하고 다른 미분양 아파트는 매입하지 않는가? 이는 불공정한 시장 교란에 해당하며, 특혜 시비도 있을 수 있다. 즉, ‘공정과 상식’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정치나 민주주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윤석열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해야 할 제언이 문재인 정부에 해야 했던 그것과 거의 같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런 식의 기회주의적 포퓰리즘을 남발하는 모습이 보수 정부의
민낯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우리 정부는 주택 가격을 정부가 조율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고, 시장에의 섣부른 개입이 오히려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음을 알려야 한다.
--- p.84~85, 「사회의 예측 가능성과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관성 없는 경제 정책」 중에서
앞서 저출산은 ‘사회 재생산의 보이콧’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는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자신의 노후가 걱정인데, 아이 밑에 다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아이를 낳고 싶어도 그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 일자리, 복지, 노후 등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면? 그러니 저출산은 실은 단순한 출산과 육아, 교육 여건의 개선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이는 노후 문제, 일자리 문제, 산업 구조의 전환과 경제 성장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문제이다. 한마디로 희망이 없는 나라, 미래가 불확실한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케케묵은 인식만으로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보수든 진보든 상대방을 쓰러뜨리려는 소모적인 대립을 중단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사회를 만드는 데 그 역량을 집중해야만 한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p. 131~132,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지 않은 나라」 중에서
그동안 대한민국의 노동 운동이나 진보 정당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리만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전 세계와 경쟁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모두가 정규직, 즉 평생 고용하는 영구직(permanent worker)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채 구호만 난무한 정치는 국민들을 희망고문하는 것이다. 그것처럼 무책임한 게 없다. 현실적 대안을 고민하고 실현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중략)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즉, 비정규직의 부당한 차별을 해소하고, 그들 삶의 안정성을 높여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기보다 ‘비정규직도 살 만한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해법을 찾아서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정치인이 능력 있는 정치인 아닌가?
--- p. 179~180, 「‘거대한 전환(Grand Transition)의 길을 찾아서’」 중에서
이처럼 한미 동맹과 일본과의 우호 관계는 유지하면서, 중국 및 러시아와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 혹은 최소한 평화적 상호 존중 관계라도 유지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외교의 측면에서 주체적 자율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인도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면서도 러시아와 필요할 때는 교류한다거나, 베트남처럼 미 항공모함의 주둔을 용인하면서도 중국의 물류 기지로서 상거래를 활발히 한다거나 하는 전략적인 외교를 구사해야 한다. 심지어 미국이나 일본조차도 뒤로는 중국, 러시아, 북한 등과 대화하고 교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윤 대통령 혹은 검찰세력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지금처럼 예민한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이러한 주체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세계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한국은 우리와 입장이 유사한 나라와 연대해야 한다. 예를 들면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국가들이나 인도나 브라질과 같은 ‘브릭스BRICs’의 일원인 비교적 국제 사회에 개방적인 제3세계 국가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 캐나다 등의 중견 선진국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p.213~214,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고 국제 공공재를 형성하려면’」 중에서
어떻든 궁극적으로는 통일이 더 나은 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구나 지금 같이 원자재 등 공급망 재편 속에서 자원민족주의와 블록경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생존을 위해 내수 시장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인구 5천만에 불과하고, 노동력(인건비)은 비싼 편이라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 북한의 근면하고 저렴한 노동력이 결합하고, 남북한 경제의 결합으로 내수 시장이 8천만 이상으로 커지면 경제 성장은 엄청날 것이다.
GDP 규모도 현재 세계 10~13위의 규모에서 7~9위 정도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통일 이후에는 북한의 인프라 개발에 투자를 통한 경기 부양, 북한의 잠재적 소비 시장 활용 등이 가능해진다. 당장 통일까지는 어렵더라도 남북한 경제공동체만 구성되더라도 우리의 경쟁력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만만치 않은 통일 비용과 과도기적인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한의 통일은 남북한 모두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 아마도 우리가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고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통일이라는 과업을 두어 세대 이후로 미루더라도, 만약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내용과 비슷한 방향으로 우리의 외교·안보 국가 전략이 전개된다면, 후손들은 결국에 통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강한 나라’의 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이다
--- p. 230~231, 「'남북한 핵 균형과 통일로 가는 길'」 중에서
나는 대통령제를 유지하더라도 지금처럼 어느 한 진영, 어느 한 정당만을 대변하는 일부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대통령으로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임기 중 탈당하는 방안이 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견제 기능을 강화해 ‘개발독재식 대통령제’에서 ‘민주적 대통령제’로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나 감사원 등이 대통령을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광범위한 임명권, 시행령을 통한 정부의 법안제출권과 예산작성권을 손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각제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반드시 시기를 분리해서 치러져야 한다. 혹은 미국처럼 의회를 분리해서 두 팀으로 나누어, 절반씩 교체하는 선거를 치러서 2년에 한 번씩 절반의 총선으로 민의를 수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는 주권재민의 원리가 실질적으로 실현되고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강화되는 제도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기후 변화, 새로운 노사관계, 시대착오적이거나 권위적인 행정 질서 정리, 양극화 해소, 국제 관계에서의 국가 전략 등도 새로운 질서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87년 체제’의 시효가 사실상 끝났으며,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많은 이가 공감하고 있다.
--- p. 269~270, 「‘아직 실현되지 못한 2017년의 시대적 소명’」 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제3의 길은 ‘정의로운 길’이다. 내가 어느 편이냐에 따라 그 정의로운 길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느 편이든 간에 공통의 정의로운 길을 우리는 찾아가야 한다. 마치 대법원 앞의 정의의 여신상처럼…. 사람들은 정치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먼저 “너는 누구 편이냐?”부터 묻고, 우리도 스스로 “나는 누구 편인가?”를 먼저 물은 다음에 그에 따라 진실과 정의를 달리 판단하는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나는 더불어민주당 이전에 대한민국 정치인이고, 국민의힘 이전에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 사령관 역의 전두광이 장태완 사령관 역의 이태신에게 자기랑 같은 편이 되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이태신은 “대한민국 군인은 다 같은 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어느 정당 이전에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나는 누구 편이 아니라, 국가의 편이고, 국민의 편이다. 우리 모두 어떤 인연이나 이해관계, 정책적 공통점에 의거하여 특정 정당에 몸담고 있지만, 우리 정치인들이 판단하는 모든 기준은 ‘선국후당(先國後堂)’, ‘선민후당(先民後黨)’이어야 한다.
--- p.273~274, 「‘나는 누구의 편이 아니라,국가의 편이고, 국민의 편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