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화는 1950년대 말 만화방 시대로 시작되면서 아동들이 보는 계몽 목적의 준공공재 수준의 그림책이었고, 특히 1960~1970년대를 지나며 군사정권으로부터 항상 감시당하는 교육용 미디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정체되고 한정되던 만화를 긴 잠에서 깨게 한 ‘천재’가 있었다.
그의 시도는 계몽적이지도 않았고 교육적이거나 점잖지도 않았다. 독설과 비유, 성적 농담과 언어유희, 자기도취와 역사 왜곡 등 그가 대사와 연출에서 보여주는 시도는 처음 만나는 만화였고, 지면 또한 만화방이 아닌 일간지 스포츠 신문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만화책을 보면 어른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성인들은 신문에서 매일 만나는 그의 만화에서 본인이 성인이라는 자존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1972년 고우영의 〈임꺽정〉은 그렇게 《일간스포츠》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 p.24, 「[만화의 문학적 도전과 성인 만화의 뉴노멀] 고우영」 중에서
〈행복의 별〉은 주인공이 가난, 이별, 죽음과 같은 불행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작품은 불행으로 인한 연민의 감정 대신 조형적 아름다움과 세련된 도시의 삶을 선택했다. (중략) 〈행복의 별〉에는 불행에 허우적거리는 소녀들이 아니라 근대 도시의 화려한 삶이 등장했다. 화려한 저택, 멋진 전문직 여성 그리고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두 소녀까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가장 공을 들인 정책 중 하나인 의무교육의 혜택을 겨우 받기 시작한 소녀(1959년 취학률이 96.4%가 되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겨우 완성되었다)들은 만화방에서 엄희자 만화를 보며 새로운 꿈을 만났다.
--- p.83, 「[화려한 소녀들이 왔다, 한국 순정 만화의 대모] 엄희자」 중에서
1970년대, 이름도 낯선 독고탁이라는 캐릭터가 마운드에 선다. 산업화의 기치 아래, 선진 조국이라는 아지랑이 같은 명분 하나에 인권과 노동이 비민주적 정치로 무시되던 시절, 우리에게는 비상구가 필요했다. 이상무는 그런 탈출구를 소년들에게 열어준 선물 같은 작가였다. (증략) 1971년 〈주근깨〉에서 독고탁은 처음 등장했다. 부모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야구를 시작하는 캐릭터로 당시에는 생경한 반항아였다. 스스로 변장하고 얼굴을 바꾸어 야구에 뛰어든다는 스토리로, 삶의 도전을 야구 만화에 대입한 시도였다. 당시에 스포츠 만화는 생소했다. 야구 중계가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스포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던 시대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고, 정치적 변동과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깨어나던 긴박한 산업화의 시간이었다.
--- p.99, 「[격랑의 시대에 독고탁으로 마구를 던졌던 작가] 이상무」 중에서
허영만은 시대가 원하는 만화를 한발 앞서 그렸고, 독자들은 ‘허영만’이라는 이름을 신뢰했다. 1988년 《만화광장》에 연재한 〈오! 한강〉은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최초의 만화였다. 1990년 첫 시리즈가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수퍼보드〉는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허영만 특유의 유머러스한 캐릭터가 애니메이션 인기의 원동력이었다.
--- p.125, 「[카멜레온 같은 작가] 허영만」 중에서
까치 오혜성은 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실패한 루저들을 모아 무인도로 떠나는 지옥 훈련의 시작에서 손병호 감독은 이렇게 내뱉는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게 해주겠다.” 군사정권에 기죽어 살던 청춘들에게 이현세는 주인공을 통해 이렇게 외쳤다. 마치 찐한 멜로의 순정이 그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독스러움인 것처럼. 자신의 신념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바꾸어보겠다는 청춘들의 용기도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지 싶다. 당시 신념의 경계에 서 있던 청춘들에게 만화방은 해방구였다.
--- p.151, 「[만화로 근현대사의 아픔을 부숴낸 남자] 이현세」 중에서
1986년에 발표되기 시작해 1995년에 마무리된 판타지 대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미래는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내레이션으로 유명하다. (중략) 데뷔작에서부터 자기 삶의 주인으로 운명과 맞서 싸우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신일숙은 할리퀸 로맨스 소설을 각색해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사랑의 아테네〉를 1985년 발표하고, 1986년부터 우리나라 만화사에 남을 장편 대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 p.170, 「[운명에 맞서고, 미래를 바꾸는 여성을 그리다] 신일숙」 중에서
단 한 작품 〈이끼〉로 검증받은 윤태호 웹툰의 저력은 이후 미완성작의 각색본 영화 〈내부자들〉로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지상파 모두가 거부했던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이야기 〈미생〉으로 케이블 채널 tvN을 드라마 왕국으로 만들어냈다. 모두가 지상파 드라마 원작이 되려면 남녀간 로맨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협박 아닌 겁박을 할 때도 윤태호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처럼 본인의 방식을 뚝심 있게 고수했다. 색다른 드라마를 만난 대중들은 그런 신선함과 도전 정신에 환호했다.
--- p.246, 「[웹툰 키즈의 대부, 실험과 도전의 방랑 무사] 윤태호」 중에서
작가와 독자의 팬덤이 튼튼한 여성 만화는 신인 작가가 대중적인 인기 작가로 올라서기 쉽지 않았으나 천계영은 달랐다. 천계영은 기존 만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연애, 성공, 우정 같은 친숙한 주제를 당대 청소년 독자의 취향으로 재현했다. (중략) 1990년대 후반 혜성처럼 등장해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의 연이은 성공으로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오른 천계영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디지털 제작과 유통이라는 파도도 외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빨리 변화를 받아들였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에서는 3D 프로그램을 원고 제작에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디지털 툴을 만화 제작에 활용한 작가는 많았지만 3D 프로그램으로 캐릭터를 미리 만들고, 이를 활용해 만화 컷을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2D로 변환하는 형태의 제작 방식을 구축한 작가는 천계영뿐이었다. 이런 혁신적 시도는 2020년에 음성 명령으로 만화를 제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 p.267,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언니가 있다] 천계영」 중에서
〈비빔툰〉은 작가 홍승우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독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만화의 재미를 위한 과장이나 강한 캐릭터를 등장시킨 슬랩스틱 대신 일상을 치밀하게 관찰해 그 안에서 재미를 담아냈다. 육아를 기반으로 한 생활 이야기는 그동안 일간신문이 담지 않았던 일상의 이야기였다. 다른 언더그라운드 작가들과 더 일상적인 이야기, 더 고전적인 만화 형식에 매달린 홍승우의 시도가 성공했다. 1998년 5월 〈정보통 사람들〉로 시작해 1999년 5월 〈비빔툰〉으로 옷을 갈아입고, 이후 2011년 12월까지 총 14년 동안 정보통, 생활미, 정다운, 정겨운 가족은 매일 독자들을 찾아갔다.
--- p.282, 「[명랑 만화의 계승자] 홍승우」 중에서
강풀은 웹툰의 개척자다. 웹툰은 만화를 인터넷으로 유통하는 인터넷 만화가 아니라 인터넷에 공유·확산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매체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디지털, 인터넷 인프라 확대와 함께 개인 홈페이지에 부정기적으로 한두 컷으로 구성된 만화가 연재되거나, 신문에 연재된 만화가 인터넷에 공유되는 시기를 거쳐 2003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만화 속 세상’ 코너가 신설되고, 그 해 10월 4일 강풀의 〈순정만화〉가 연재되며 웹툰 시대가 시작되었다.
--- p.289, 「[장편 서사 웹툰의 개척자] 강풀」 중에서
〈마음의 소리〉는 다른 웹툰보다도 그러한 번역 리스크가 가장 복합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해외에서 인기가 있다 보니, 번역의 의외성이 대중적 인기를 확장하기도 한다. 중국 현지에서 팬 사인회를 하던 조석에게 중국 팬이 큰소리로 질문을 한다. 전혀 스토리에 등장하지 않았던 대사와 새로운 표현을 느닷없이 웃으며 질문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중국 팬들이 모두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국 현지의 독자 중 한국 웹툰 마니아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기획하고, 대사를 바꾸어 창작한 버전의 중국판 〈마음의 소리〉를 연재하기도 한다. 어떤 독자들은 번역된 정식 작품보다 중국판으로 리메이크된 대사의 작품을 더 선호하는데, 실제 그러한 대사 리메이크 버전이 더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번역비를 받기도 한다. 조석의 작품이 그 표현과 연출만으로 해외에서도 새로운 스토리로 순간 변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의 작품임을 알게 된다. 그 정도의 의외성이 가능한 작품이어야 실제 글로벌한 웹툰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 p.201, 「[병맛에서 서사까지 장르 실험왕] 조석」 중에서
색다른 소재와 세련되지 않은 민낯의 그림으로 약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가가 있다. 그는 사인회나 강연회를 제외하면 오프라인에서는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인터뷰에서조차도 얼굴을 호랑이 캐릭터 탈로 가리는 유니크한 작가, 그가 김보통이다. ‘원하는 장르’와 ‘익숙한 소재’ 그리고 ‘친숙한 방식’의 웹툰이 넘쳐나는 시대,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와 로맨스 코미디가 전체 연재 웹툰의 7할 이상이나 점유하게 된 장르 편향의 시대에 김보통 작가는 조금은 다른 길을 내며 웹툰이라는 이야기가 드라마와 영화의 관점을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지, 사회적 소수의 닫힌 이야기를 대중의 관심과 논쟁의 이슈로 얼마나 바꾸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 p.336,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로 대중적인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모험가] 김보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