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뇌전증은 3분에서 5분 정도 지속되는 길지 않은 발작을 반복하는 질환이다. 1년에 두세 번 이 정도의 발작을 하는 상황은 어찌 보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 발작을 하는 환자들이라도 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갑자기 정신을 잃거나 쓰러져서 대경련 발작을 하는 증상이 예측 안 되는 시간에 발생할 수 있는 특성이 심각한 심리적 부담감을 초래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뇌전증 환자는 심리-정서적 건강 상태가 나쁜 경우가 많고 삶의 질이 심하게 떨어진다. 소아환자는 심리-정서 이상을 포함한 행동 장애가 일반 아동의 6배에 이르고, 소아 당뇨 같은 다른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아동들과 비교해봐도 3배 이상 높다.
심리-정서 이환 질환은 우울증 또는 불안증으로 나타난다. 이런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는 설사 뇌전증이 완벽하게 조절된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 뇌전증 환자들의 자살률이 일반인보다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심리 상태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 가족 건강이나 사회적 교류 관계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준다.
--- p.75, 「뇌전증의 심리-정서-행동 관리」 중에서
실제로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이상의 발작과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지적 장애까지 진행된 환자 중 칸나비디올(대마씨유에서 추출한 약 성분) 복용 후 거짓말처럼 건강이 회복되는 환자를 많이 목격한다. 문제는, 아직 이 약제에 대해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 달에 100만~300만 원에 이르는 약값이 부담스러운 환자들과 그 부모들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고가의 약제비로 인해 보험 재정에 무리가 올 것이라는 우려로 이 약제의 보험 급여 확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증 난치성 뇌전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은 아무리 많아도 5,000명을 넘지 않는다. 또 그중 이 약으로 확실한 도움을 받아 계속 복용해야 하는 아이들은 20%를 넘지 않는다. 이 약을 꾸준히 계속 사용할 아이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보험 재정의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이 아이들의 건강권을 휴지 조각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 p.123, 「건강보험 급여화에 대한 단상」 중에서
칸나비디올 사용에 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대표적인 난치성 뇌전증으로 알려진 ‘레녹스-가스토 증후군’과 ‘드라베 증후군’ 환자이어야만 한다. 또한 이 약을 쓰기 이전에 심평원에서 지정한 약제 목록 중 최소한 다섯 가지 약제로 치료를 받았어야 한다. 치료 시작 이후에 발작이 50% 이상 줄지 않아야 하고, 소아 환자에게 ‘클로바잠’이라는 약도 반드시 동시에 사용해야만 인정된다. 그런데 클로바잠은 소아 환자에게 호흡기 부작용으로 폐렴을 쉽게 유발할 수 있고, 기운을 많이 처지게 한다. 이 클로바잠 약물 사용은 국제학회나 여러 나라에서는 권장하지 않는다. 미국뇌전증학회에서만 권고 사항으로 추천한 약제인데, 한국에서는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준으로 정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험 급여가 인정되지 않는 황당한 사례가 끊이지 않고 보도된다. 이미 기존의 약으로 발작 증세가 50% 이상 조절됐다는 이유로, 부작용이 심각한 클로바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규정된 약물치료가 아닌 다른 치료(수술이나 식이요법)는 해당이 안 된다는 이유로, 국소 뇌전증이 2차적으로 레녹스-가스토 증후군으로 진행된 환자임에도 레녹스-가스토 증후군이 ‘전신 뇌전증’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이유로, 보험 급여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 p.127, 「심평원을 폭파하세요」 중에서
칸나비디올의 보험 인정 기준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덜 전문적인 성인신경과 의사가 위원장을 맡고, 보다 전문적인 소아신경과 의사의 의견을 ‘비용 부담이 추가로 발생한다’는 이유로 배제한다. 그 결과 보험 재정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더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그러한 기준으로 약제비를 최대한 삭감한다. 기준의 완화를 위해 끊임없이 요구하는, 보다 더 전문적인 집단의 목소리를 계속 외면하는 지금의 행태가 그 나름의 피눈물 나는 심평원의 노력이다.
--- p.128, 「심평원을 폭파하세요」 중에서
WHO는 뇌전증을 국가가 관리해야 할 중요한 질환으로 선포하고 각국의 보건 담당 행정부서에 이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뇌전증 환우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한국뇌전증협회도 국제뇌전증 협회의 한국지부로서 함께 참여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뇌전증 환우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뇌전증협회는 대한뇌전증학회와 더불어 정부를 상대로 지난 20여 년간 끊임없이 관심을 촉구해왔다. 과거에 ‘간질’로 불렸던 질환명을 과학적인 용어인 ‘뇌전증’으로 바꾸었고, 뇌전증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방송, SNS, 국회 청원 등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변화는 미미하다. 환우들이 이 질환을 감추지 않고 알리면서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직접 예산을 편성해 이 질환을 시민사회에 정확히 알리고 교육해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그동안의 활동에서 체득한 결론이다.
--- p.142, 「뇌전증 환자를 위한 공공 의료 관리」 중에서
뇌전증, 간질, 경기……. 어떻게 표현해도 아픈 말이다. 사실 나는 그 말이 주는 여러 맥락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절실히 극복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내 아들도, 또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 p.203, 「환자들 이야기 ― 찾아가는 희망에 대하여」 중에서
얼마 전 병동에 새로 찾아온 환아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나이에 비해 해맑고 천진해 보였어요. 말투도 또래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 표현을 구사했죠. 환아 어머님은 그 아이를 붙잡으시면서 저희에게 “제 아이는 장애가 있어요.”라고 거듭 설명하셨어요. 아시다시피 저희 병동은 뇌전증에 특화된 병동이라 비슷한 환아가 일상적으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저희 간호사 중 누구도 그런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도 아이 어머님이 긴장을 푸는 데에 시간이 더 필요했던 듯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병동 밖 세상에서는 아직 뇌전증 환우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죠. 저는 많이 변했으나 세상은 아직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이죠.
--- p.252, 「환자들 이야기 ― 눈물을 견디고 도착할 빛의 시간을 위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