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저요 외국 가요.”
아이의 뜬금없는 말에 민환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빠는 안 가도 된다고 하는데 엄마가 안 된다고. 지금부터 가야 영어도 잘한다고…….”
아, 아. 또 하나의 극성스러운 어머니군.
“그래서, 그래서 일주일 뒤엔 외국 가야 해요.”
아이의 작은 손은 부드럽고 뜨거웠다. 쉽게 뺄 수 있는 손을 아이에게 맡긴 채 민환은 계속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러니까 한참, 아주 한참 있다 와야 해요.”
아이의 아주 한참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민환은 아이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절절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이상하게도 쉽게 아이한테 갈 수 없었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멈추지 않았다면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민환의 목소리에 차가움이 스며 있었다. 말한 본인도 듣는 아이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갔다 올 테니, 왕자님 그때 나 다시 만나주면 안 되나요?”
아이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색과 감정을 띠고 있는지 아직 잘 몰랐다. 그냥 민환이 보고 싶고 좋을 뿐이었다. 헤어진다니 아쉽고, 아쉬웠다.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마음으로 애원했다.
“꼭 올 테니, 그때 다시 만나줘요. 네?”
아이의 애잔한 시선이 민환의 얼굴을 찔렀다. 알고 보면 어이없는 부탁이었다. 몇 년 외국에 갔다 온다고 해도 아이와 민환은 쉽게 다시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죽는 게 아니면 말이다. 자신들이 사는 세계는 웬만해선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걸 아이에게 알려줄 마음은 민환에게 없었다.
애절하게 매달려 오는 아이의 마음이 가지고 싶어져 버렸다.
민환의 인생엔 부족함이라곤 없었다. 식구들 사이에서의 애정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많이 받으면 받았지 모자람이란 전혀 없었다. 애절함도, 절박함도 민환에겐 인연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감정이, 자신은 잘 모르는 감정이 탐이나 버렸다.
“좋아. 기다려 주지. 네 이름은?”
“네? 정말요?”
자신이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아 아이는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러니 네 이름은?”
왜 이름을 묻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이는 알려주었다.
“세희, 최세희요.”
“최세희라. 너 나를 기다린다는,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을 하게 하는데 그 보답으로 뭘 해줄 생각이지?”
“보답이요?”
세희는 기다려 준다는 민환의 대답에 기뻤다가 보답을 요구하자 고민에 빠져 버렸다. 아직 너무나 어린 세희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돈 없는데요.”
“그래?”
“네.”
“그래서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한 후 입 닦을 생각?”
“그건 아니에요.”
세희는 도리질 쳤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어 민환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입을 올리면 더 화사해지는 민환의 얼굴에 아이가 시선을 뺏겼다.
“뭐, 좋아. 난 돈 많으니 그건 제해주지. 대신, 내가 지금부터 열심히 생각해서 다시 만난 날 이야기하지. 그때 내가 뭘 요구하든지 거절하면 안 된다.”
“네.”
세희는 민환의 얼굴에 빠져 쉽게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 기다려 준다는 민환이 늦게 대답하면 변할까 무서워 더욱 냉큼 대답했다.
“말로만 하면 후에 모른다고 할 수 있으니까…….”
“안 그래요.”
말을 끌며 고민에 빠진 척하는 민환에게 세희가 소리쳤다. 양 주먹을 꼭 쥐고 발그레해진 볼이 눈에 띠었다. 그 모습을 슬쩍 본 후 ‘그래도 보증은 필요하지.’ 하며 민환은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냈다. 휴대 전화기 메뉴에서 녹음 기능을 실행시킨 후 세희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다 너 이름과 후에 내 말을 듣겠다고 말해.”
세희는 녹음 기능의 표시가 움직이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최세희는 후에…….”
“이민환.”
“이민환 아저씨.”
“잠깐. 아저씨라니. 난 아직 아저씨라는 소릴 들으려면 멀었다고.”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민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뭐라고?”
“오빠라고 해.”
“네.”
오빠라고 하기엔 이상했지만, 왕자님이 하라고 했으니 따르기로 했다.
민환은 앞의 녹음된 부분을 지우고 다시 녹음을 실행시켰다.
“최세희는 다음에 돌아오면 이민환… 오빠의 말을 들을게요.”
세희가 말을 마치고 민환을 쳐다보자, 그는 녹음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한 후 휴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뒤 무릎과 허리를 구부려 세희와 시선을 맞췄다.
“최세희, 잘 다녀와라.”
눈을 맞추며 다녀오라고 왕자님이 말해 주었다. 자신은 이제 저 말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세희는 기뻤다.
“네.”
웃으며 대답하면서 세희는 이제 멀고 먼 외국으로 가는 길이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갔다 오면 왕자님이 자신을 만나 줄 테니 말이다.
무더운 여름, 19살과 7살의 말도 안 되는 약속이 체결되었다.
이 약속은 아이의 순수함,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남자가 처음 맛본 애절함이라는 감정에 대한 호기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순수한 아이와 달리 어른이 되어가는 민환은 마음 한구석에 이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믿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