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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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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강우근 | 창비 | 2024년 01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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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244g | 125*200*11mm
ISBN13 9788936424961
ISBN10 8936424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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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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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불이 꺼질 때 나의 영혼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궁금해
내가 희미해질 때 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검게 물들어가는지
내가 사라질 때 또다른 빛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얼마나 생생할까
어디선가 달리고 있을 아이들은 모래알처럼 빛이 날까, 초원의 풀처럼 자꾸만 솟아날까
용기가 없는 사람의 용기가 정말로 궁금해
잠들기 싫은 날에 나를 오래도록 켜놓은 사람의 다음 날이
힘을 내려고 밥을 푹푹 떠먹는 사람의 아침 인사가 궁금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 하얀 연기는 내가 말하는 방식일까, 당신이 말하는 방식일까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나를 자꾸만 피운다
나는 당신에게 몇분의 기억이 될 수 있을지
당신이 읽는 책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
당신이 울면서 했던 기도가 이루어졌을
세계에서 당신이 지을 환한 미소가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중에서

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를 그것과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창가에 키우는 식물이 많아질수록 너의 습관과 기분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식물에는 모두 그 씨앗을 흙 속에 묻은 정원사의 영혼이 담겨 있어
죽어가는 식물에서 조심스레 흘러나온 영혼이 너로 하여금 단단한 씨앗을 집게 할 것이다
한밤중에 너에게서 빠져나온 이상한 꿈들은 방향을 어디로 바꿀지 모르는 꼬리처럼 너를 따라다닐 것이다

(…)

네가 가방 속에 넣어둔 작은 열쇠가 쓰일 때마다
정말로 네가 원하던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의 몸속에서도 작은 열쇠를 찾을 수 없을 때
너는 누군가가 사라진 것들과 함께 이 마법 창고를 옮기는 것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법 창고가 텅 빌 때까지 너는 너에게 대화를 요구하는 사물을 거리에서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중에서

겨울의 끝에서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던 날
문득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저 나무가 슬프지 않아?”
물었을 때 너는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심기는 순간 나무에는 떠나갈 수 있는 영혼이 생긴다고,
나무들은 유령처럼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영혼을 가졌다고,
너 또한 한그루의 나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채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너는 나무들이 모인 마을에서 왔다고 한다

(…)

길을 걷다가 문득 나무가 나를 쳐다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시 너한테서 내 이야기를 들은 나무가 아닐까,
이 나무는 너와 사촌 정도 되는 관계가 아닐까 추측하며 멈춰 서 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무가 내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너처럼 느껴진다.
나무가 바람에 떨면 내 몸도 같이 떨린다.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면 나에게서도 무언가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네가 등 뒤를 툭툭 쳐줄 때까지 나는 종종 이렇게 나무와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무들의 마을」중에서

나는 매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티백이 되어서
당신들은 몇번이나 탁자 앞에 마주 앉은 적이 있을 것이다
탁자에 컵이 내려앉는 동안 당신들의 얼굴은 변해갔을 것이다

(…)

내가 사라진다는 건 어떤 거지?
겨울철 비슷한 외투를 입은 두 사람의 어깨가 찬 바람에 서서히 닳아가는 것과 같은 걸까, 어깨를 맞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한낮의 조명 같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숲의 웅크림일 것이다
겨울 숲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놓자마자
햇빛에 닳아가는 눈사람처럼
가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는 자세일 것이다
슬픈 감정을 슬픈 노래로 무마하려는 마음 같은 것,
그 마음의 끝에 다다르는 감정일 것이다
---「말차의 숲」중에서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과학자가 살고 있는지
착한 과학자, 나쁜 과학자, 엉뚱한 과학자……

과학자를 처음 꿈꾸는 건 얼마나 순수했는지 그러나 폭탄과 공장을 만들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차지하는 것을 보는 과학자는 얼마나 많은 마음을 스스로 터트려야 했는지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

밤을 발명한 과학자는 보이지 않고, 우리를 모두 검은색으로 덮으려고 한다
우리를 잠시 마비시키려고 한다

사각 서랍장 속에서 테두리를 빙빙 돌며 멈출 때까지 춤을 추는
로봇 병정들처럼,

우리의 두 손과 두 발이 멀쩡히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하지 두 손과 두 발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와 같이 태어난 세계를 사랑하고
증오한다는 것이

초마다 신호를 주고받는 핸드폰에
우리의 얼굴 조각을 남기며

전파는 지구의 거대한 띠를 이룬다

새해에 해돋이를 보기 위해 동해안으로 떠나는 우리의 기도는 고속도로를 정체되게 하지 연기를 피워 올린 채로

해를 발명한 과학자는 그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햇볕을 쬐며 양팔을 벌린 나무가
나무로부터 태어나고
두 손을 모으며 전기톱으로 나무 자르는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릴 수가 없겠지
---「세상의 모든 과학자」중에서

하늘은 미래의 새들로 가득하고
날이 좋은 공원의 벤치에는
언제나 가능성이 있다

한 사람의 낮잠과
두 사람의 대화
다섯마리 고양이의 숨바꼭질과
수십마리 새의 휴식

우리는 매일 작은 침대에서 나와
작은 침대로 돌아간다

꿈속은
빠져본 적 없는
푸른 바다처럼 넓다
---「희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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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의 시에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영혼이 깃든 사물로 화(化)한다. 만물에 영혼이 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을 몸소 실천하는 듯한 그의 시는 세련된 도회적 감수성을 바탕에 깔고서 주변 사물에 깃든 영혼을 세심하게 발견하고 형상화한다. 과학 만능의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저와 같은 작업이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식물처럼 묵묵히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는 시에서 한가지 단서가 보인다. 사물이 식물이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잎을 펼치는 식물의 방식을//최선을 다해 이해하고”(「점선으로 만들어지는 원」)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과업이자 작업이지 않을까. 이런 짐작으로 시를 다시 보면, 이상하게 화자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화자를 보는 장면이 자주 도드라진다. 온갖 사물에 깃든 영혼이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말을 걸어오고,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은 강우근 시의 주된 화법 중 하나다. 최선을 다해 대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의 시선은 결코 공격적일 수가 없다. 누구보다 순하고 선한 마음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그의 시에 와서는 일상처럼 벌어진다. 거기서는 주체와 대상이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자리를 사이좋게 바꿔가며 한데 어울린다. 갈등이나 분열과는 거리가 먼 화자의 시에서 새삼 일깨워지는 감정도 그래서 맑음이고 환함이다. 그 맑음과 환함을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 또 그의 시를 읽게 할 것이다.
- 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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