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가 물었다. 나도 파티마로 갈 거면 내 배낭을 그들 차량에 싣고, 함께 걷겠느냐고. 대번에 예스다. ‘내게 그리 나쁜 일이 생길 리가 없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더군다나 4 년 만에 찾아온 까미노에서, 성지로 향하는 성스러운 길 위에서 만난, ‘순례’라는 성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게 사기를 칠 리가. 13kg 이나 되는 배낭 덩어리를 맡기고, 5 일간 고스란히 걷는 데 집중할 수 있다니. 센트럴 루트를 따라 산티아고까지 걸을 계획이었지만 파티마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험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편인 나는, 기쁘게 우연에 탑승했다.
---「Day 2. 모스까비지 ~ 빌라프랑카 지 시라 : 33 명 포르투갈인을 단체 멘붕에 빠뜨린 날」중에서
발라다에 다가갈수록 비는 기세를 더해가더니, 나중에는 바람까지 거세다. 비바람에 정신없이 펄럭이는 우비를 수습하려 안간힘을 쓰며 걷는데, 프란시스코 아저씨가 옆에 와 함께 걷는다. 파티마까지 걷는 내내 챙겨주던 아저씨는 힘들어 보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말동무를 자처했다. “수, 포르투갈 4 월 날씨는 늘 이래. 비가 많아. 맑다가도 쏟아지고, 쏟아지다가도 금세 그치는데 비가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밀즈 오브 레인'이라고 해. '밀 mil'이 포르투갈어로 ‘천’이거든. 오늘은 밤새 비가 온다네. 1 천 리터의 비가 쏟아지는 4 월 포르투갈에 온 걸 환영해.”
---「Day 3. 빌라 프랑카 지 시라 ~ 발라다 : 1 천 리터의 비가 내리는 4 월」중에서
클라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노 프라블럼” 했다. 그리곤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가져와 내밀었다. ‘… 어쩌라고? 어디서, 어떻게?’ 영문을 모르겠다가 ‘설마’ 싶다가 진심으로 당황했다. 짧은 순간에 스쳐 가는 표정 변화를 캐치했는지 클라라는 휴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수, 산타렝까지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려. 이제 오르막이 시작되면 더 힘들 걸. 여긴 포르투갈이야. 다들 그렇게 해.”
...
적당한 곳을 물색하려니 이미 하얀 휴지들이 곳곳에서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이후 내 까미노는 훨씬 편해졌다. 익숙했던 한국식 삶의 규칙을 내려놓았더니 벤피카 사람들과 헤어져 포르투갈을 걸을 때도, 산티아고까지 완주한 다음 스페인 북쪽해안길을 걸으면서도 길은 한층 자유로워졌다.
---「Day 4. 발라다 ~ 산타렝 : 포르투갈에선 포르투갈 룰」중에서
도시 야경과 대학 축제를 구경할 겸 어둠이 내려앉은 코임브라 밤거리로 나섰다. 마술을 부리다 되레 자신의 마술에 걸린 듯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코임브라 해리포터들은 길에 선 채 춤을 추거나 악다구니하듯 단체로 노래를 질러대며 축제의 마지막 밤을 아쉽게 붙들고 있었다. 거리에 얼마나 술을 뿌려댔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제대로 찐득거리는 돌바닥에 신고 있던 플립플롭이 쩍쩍 들러붙었다.
…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Youth is wasted on the youth.’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처음 듣고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내가 그 젊음을 낭비해버린 청춘인 것 같은 자책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찢어진 플립플롭을 신고,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해리포터들과 헤르미온느들 틈을 비집으며 호스텔로 돌아오던 코임브라 밤거리에서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눈부시도록 빛나고 아찔한 젊음은 젊은이가 소비해야지, 시간이 너무 소중해 함부로 쓸 수 없을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지 않나. 소중한 시간을 꼭꼭 아껴 담아 살뜰하게 꾸리는 건 이미 한 번 청춘을 통과한 사람들 몫으로 주는 게 맞을 것 같다. 젊음은 젊은이가 소비, 아니 낭비하도록 그냥 두고.
---「Day 14. 코임브라 ~ 아나지아 : 하루가 데려다 놓는 곳」중에서 에서
N-3 지방도로를 따라 간간이 이어지는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최종 도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지만, 파티마로 안내하는 건 파란 화살표다. 걷다 보면 도시의 흔적은 점점 옅어지고, 리스보아와 포르투를 잇는 A1 고속도로와 교차하며 점점 더 한적한 교외로 이어진다.
어느덧 파티마까지 50km. 제법 호젓한 길로 접어들었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해가는 나뭇이파리들이 실바람에 흔들리며 사르륵 소리를 낸다. 아직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 시각. 이렇게 쾌적한 상태라면 종일도 걷겠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 잔디가 펼쳐지고 올리브 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는 풍경이 어쩐지 이스라엘 중부 지역을 연상시킨다. 이스라엘 출장 중 메마른 땅에 바위와 올리브 나무가 들어선 중부 지역을 자동차로 지났는데, 그날 이후 지중해 어느 곳에서도 올리브 나무를 보면 이스라엘의 건조한 대기와 그날 공기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Day 5. 산타렝 ~ 올류스 지 아구아 : 포르투갈에서는 빵, 그리고 바깔라우」중에서
그늘 없는 광장에 자비 없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의식에 집중하는 풍경에 한겨울 차가운 바닥에 한껏 몸을 낮춰 오체투지하며 라싸로 향하는 티베트 사람들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스탄불 출장 중 블루 모스크에서 정성스러운 절을 반복하던 맨발의 터키 남자들 모습도 스쳐간다. 홍해를 낀 이집트 최고 휴양지, 세계 부호들이 몰려드는 샤름 엘 셰이크 Sharm el-Sheikh 의 화려한 리조트 해변 한구석에서 자기 한 몸 엎드릴 만큼의 천을 깔고 세상과 단절된 듯 기도에 몰입하던 젊은 직원의 뒷모습도 한순간에 소환되었다. 파티마를 참배하는 사람들과 이슬람 사원의 남자들, 예루살렘에서 통곡의 벽을 붙들고 기도하던 귀밑머리 늘어뜨린 유대인과 내세를 염원하며 오체투지를 하는 불교도 간 차이는 뭔가. 보태자면 재작년과 작년에 연이은 허리와 무릎 수술로 아직 완전히 편치 않으면서 기어이 사월초파일에 절에 다녀와서는 그제야 개운하다는 우리 엄마도 그 연장선 어디쯤 서 있지 않을까. 장소는 물론이고 형식과 언어까지 어느 하나 같지 않지만, 문득 우리는 사람이구나 싶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기대고, 염원할 수밖에 없는 착하고 나약한 사람들. 하지만 또 각자 억척스러운 일상을 살아갈 강한 사람들. 그냥 보통 사람들.
---「Day 6. 올류스 지 아구아 ~ 파티마 : 그들이 파티마를 만나는 방법」중에서
혼자 시작해 혼자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함께 520 여 km 를 걸어 포르투갈 국경에서 밤을 맞았다. 파티마에서 한 번, 포르투에서 다시 한 번, 이제 발렌싸에서 또 한 번. 세번째 엔딩을 맞는 기분이다. 기대되는 한편 아쉽기도 한데, 어떤 쪽 비중이 더 큰지는 모르겠다. 이제 남은 건 스페인 구간 120 여 km. 내일부터 새 챕터가, 하지만 포르투갈길 마지막 장이 열릴 것이다. 좋은 계절에 이름 모를 축제라도 열리는지 해가 채 지기도 전부터 창문 밖이 불꽃놀이 소음과 냄새로 현란했지만, 일찌감치 잠든 순례자들 틈에 섞여 나도 채 10 시가 되지 않아 침낭을 뒤집어썼다.
---「Day 24. 후비아엥 ~ 발렌싸 : 포르투갈, 국경의 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