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벽두에 량치차오는 새로운 시를 역설했다. 그런데 소설을 새로운 국민을 만들어내는 효과적인 도구로 보면서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한 역할을 요구한 것에 비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량치차오가 가장 중요하게 모색한 것은 물론 어떻게 하면 시가 새로운 시대의식과 감수성을 충분히 표현하면서 또한 국민정신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가 ‘시답기’ 위해 가져야 하는 미학적 특질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다.……
그런데 이처럼 전통적 시의 범주 속에서 그것을 변혁할 방법을 다각도로 타진하던 량치차오가 ‘노래’, 특히 ‘군가’를 발견함으로써, 이전까지 해온 모색이 다소 무색해진다. 량치차오는 잡지 《신소설》에 ‘잡가요(雜歌謠)’라는 난을 마련해 가사체 운문을 싣기 시작했다. 량치차오는 가요의 가사가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상당한 효용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시’와 가요가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가 ‘노래’를 부각시켜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얼마 뒤 《신민총보》에 연재하던 〈음빙실시화(飮領室詩話)〉를 통해 황쭌셴의 〈군가〉 3부작을 소개하면서부터다. 량치차오는 “그 정신이 웅장하고 활발하며 드넓고 깊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러한 수사 또한 이천 년 동안 없었던바, 시계 혁명의 성취가 이에 이르러 최고에 이르렀다. 내가 한마디로 정리해 말하건대, 이 시를 읽고서 일어나 춤추지 않는 자는 남자도 아니다”라고 극찬한다. 앞서 제시한 모범들이 같은 작자가 지은, 상대적으로 투박하고 우악스러우며 대단히 선동적인 군가 가사에 의해 한순간에 대체돼버린 셈이다.
량치차오가 신식 창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부 유학생들의 활동에 주목하면서다. 그는 1903년에 쩡즈민(曾志滔)이라는 유학생이 음악학교에 입학한 것을 치하하면서, 읊는 운문으로 나름의 미학을 발전시켜온 전통적인 시·사·산곡이 사회가 발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거에 부정하며 그것을 짓는 이들을 사회의 ‘버러지’라고까지 불렀다. 그러면서 중국문학이 부흥하느냐 마느냐 하는 관건은 새로운 노래, 구체적으로 새로운 군가와 학교 창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그러한 표현으로 그동안 새로운 시의 모습을 다각도로 탐색하던 그의 고민은 퇴색하고 만다.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국민국가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는 데 아주 용이한 ‘노래’가 ‘시’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의식을 복잡한 미학적 장치들을 통해 구현할 새로운 시에 관한 사유는 부차적인 일로 밀려난 셈이다.
이러한 구도는 결국 근대 중국에서 기존의 ‘문(文)’ 질서가 무너지면서 근대적 문학체계로 재편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욕망을 드러내며, 그 중심에 자리하는 원리가 부강한 중국에 대한 열망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는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가 지적하듯이, 구망의 열망이 계몽의 열정을 쉽게 압도해버릴 수 있음을 보여준 예라 하겠다.
--- pp.23~26
정치에서 문화, 역사, 사회로 작가의 사고가 심화되면서 왕멍이 노년에 최종적으로 도달한 과제는 ‘인생’이다. 4년간 심혈을 기울인 끝에 2003년에 출간한 《왕멍 자서전―나의 인생철학(王蒙自述―我的人生哲學)》은 ‘인생’에 대한 그의 진지한 사색과 고민이 담겨 있는 결정체다. 이 책에서 작가는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격동의 중국 역사와 함께 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그 속에서 자신이 획득한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특히 2장에 보면 왕멍은 지나온 7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결국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내용이 있다. 그는 자신은 한때 당원이자 관리라는 정체성과 문학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정체성, 이 두 가지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정체성은 역사의 모진 풍운 속에 점차 상실되어갔다. 물론 뒷날 복권과 더불어 당적도 회복되고 문화부 부장의 자리에까지 이르는 영예도 얻고 또 작가로서 지위와 명성도 쌓았지만, 이런 ‘정치적 자아’나 ‘문학적 자아’는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그가 획득해낸 참된 정체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획득해낸 자신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 왕멍은 70여 년간 극단의 영욕을 겪으며 깨달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은 다름 아닌 ‘학생’이었노라고 천명한다. 뭔가 거창한 대답을 얻고자 한 바람이 실망이라기보다 일종의 의아함으로 대체된다. 왕멍은 왜 자신의 정체성을 ‘학생’으로 규정하고 있을까?
“나는 이미 고희의 나이를 넘긴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학생’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배움과 사색에는 끝이 없다는 인생의 참뜻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학생’은 나의 신분만이 아니고, 나의 세계관이자 인생관이다. 인생이란 배우는 과정이다.” 이 말은 끊임없는 배움과 사색의 과정이 있었기에 인생의 가치를 높이고 인생을 향유할 수 있었다는 왕멍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의 인생여정을 파노라마처럼 쭉 펼쳐보니, ‘학생이다’라는 그의 고백처럼 인생 굽이굽이마다 그는 배움에 몰두하고 사색하며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왔다. 16년이라는 긴 세월의 공허함과 고통도 소수민족의 삶과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것으로 감내할 수 있었다. 또 그 뒤 개혁·개방의 시대와 세계화 속에서도 수많은 서적들을 독파하고 외국어를 학습하고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며, 그렇게 왕멍은 인생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향유해왔다.
그리고 왕멍은 인생을 향유하기 위한 마음가짐으로 ‘명랑함’을 당부한다. ‘명랑함’은 신체적 건강, 마음의 평안과 홀가분함,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으로, 왕멍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명랑함’은 초월과 비약으로 도달하는 인생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환과 고통을 이겨낸 후의 명랑함이며, 역경과 위험에 봉착했을 때의 차분함이며, 모든 인생의 고난을 능히 반추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험난한 인생여정을 거쳐 어느덧 인생의 대단원에 도착한 그는 이 책을 통해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중국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아로새겨 있는 그이기에,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마다 삶의 진정한 깊이와 무게감이 실려 있다. 이처럼 낙관적이고 매사에 긍정적인 정신자세로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딛고 문단의 거목이자 사상계의 최고 지성인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왕멍이 살아온 인생은 일종의 배움의 장소였으며 사색의 공간이었다. 명랑한 자세와 태도를 갖고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창출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왕멍이 말하는 ‘학생’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이요, 그가 제시하는 진정한 인생철학이라 하겠다.
--- pp.356~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