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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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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인류학

: 인류학자가 본 어린이의 삶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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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96쪽 | 666g | 153*224*30mm
ISBN13 9788994054742
ISBN10 89940547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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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헤더 몽고메리(Heather Montgomery)
태국 아동매춘 실태를 현지 조사한 연구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인류학 박사를 받았고, 옥스퍼드 대학 사회문화인류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했다. 서식스 대학과 노르웨이 아동연구센터를 거쳐 현재 영국 개방대학(Open University) 교수다. 개방대학에서는 유년기에 대한 다양하고 통합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강의를 하고 있다. 어린이와 섹슈얼리티, 관광, 아동 권리, 인류학에서 어린이의 역할에 관한 글을 썼다. 저서로는 『현대판 바빌론?: 태국의 아동 매춘』과 공저 『유년기의 이해: 통합적 접근』, 『변화하는 유년기: 세계적 변화와 지역적 변화』가 있다. 최근 연구 논문으로는 「아동 매춘 논쟁의 주요 담론」, 「어린이의 신체: 누구에게 권리가 있는가?」 등이 있다.
역자 : 정연우
연세대학교 자연과학부를 중퇴하고 경원대학교 역사·철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가천대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이자 주부로서 살며 관심 있는 책을 번역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무허가 주거지의 성격과 의미 변화에 대한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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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제일 먼저 다룰 문제는 ‘어린이’에 대한 정의다. 국제법은 유년기를 0세에서 18세 사이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유년기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 정의가 대단히 제한적이라고 본다. 비록 태아의 수정, 출생, 첫 월경 등과 같은 명확한 신체적 표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유년기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인류학자로서 나이나 신체적 표징보다는 그 표징에 부여된 사회적 상징에 주목한다. 이 책의 뒤에서도 또 이야기하겠지만, 어린이를 어린이로 인식하는 건 출생 시기와 상관이 없을 수 있다. 때로는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어린이로 부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태어난 지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이이기도 하다. 때로는 성인식을 치렀어도, 결혼을 했어도, 심지어는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도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p.13

유년기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어린이는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며, 각 사회의 내부적 관점과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는 유년기에 대한 그 어떤 정의도 내리지 말 것을 조심스레 제안하며, 여러 가지 민족지 사례를 통해 유년기라는 개념이 얼마나 다양하며 유동적인지 보여 주려 한다. 본래 이 책에서는 유년기에 대한 ‘인류학적’ 논의에만 집중하려 했다. 나는 이 분야의 연구는 심리학자들이 점령했다가 최근에는 사회학자들에게 자리를 내줬다고 느끼고 있었고, 여기에 인류학다운 전문적이고 방대한 자료를 추가해 학제간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유년기 연구에서 순수한 인류학을 찾는 시도는 헛된 일이었다. 특히 애초부터 학제간 연구로 시작했던 북미 인류학계에서는 더욱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 책의 범위를 사회문화인류학으로 제한하는 일은, 심리학·사회학·언어학·인류학 등이 유년기 연구에서 이룩했던 커다란 공로를 무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1950년대부터 아동 발달 분야의 학제간 연구를 계속해 왔던 북미 사회인류학자들의 공로를 가벼이 여기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힘이 닿는 데까지 어린이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 집중했다. 물론 다른 학문의 연구를 인용할 때는 저자의 학문적 배경을 명시했다. 유년기라는 주제는 감정적이기도 하다. 특히 잘 모르는 문화권의 육아 방식이 이상하거나 위험해 보이는 경우, 그 부모를 향해 무지몽매하다고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맥락에서 어린이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해 보고,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 그런 육아 방식을 취했는지 알아본다면, 함부로 다른 나라의 부모들을 향해 가치판단을 내리거나 악마 취급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어린이에게 허용되는 행동과 비난 받아 마땅한 행동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예를 들자면, 여러 가지 체벌 형태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어린이를 때리는 이유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한 사회가 어린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폭넓은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용납하지 못할 육아 방식의 종류와 부당한 학대의 기준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 p.28

미드는 미국의 청소년들이 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기성사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종교적·도덕적 선택사항이 너무 많다는 점, 다른 하나는 성과 신체를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그에 반해 청소년기에 스트레스나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 사모아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요구하는 문화적 관습이 미국과는 다르고 이를 받아들이는 청소년들의 태도도 다르다. 사모아에서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얌전하고 예의바르고 과묵하고 부지런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순종적인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 어린이들은 달리 선택할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에 순순히 따르는 편이다. 단일한 종교를 믿고 모두가 하나의 교단에 속해 있는 단일한 사회다. 달리 고를 수 있는 종교적 신앙이나 사회 체제가 없으며, 이를 거역할 수도 없다. 어린이들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성을 멀리하고 동성끼리만 어울린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시 이성끼리 어울리기 시작하지만, 여자에게 애인이 생길 때까지만이다. 애인이 특정한 사회 집단(가족은 아니다)에 속해 있는 이상 이러한 관계는 용인되거나 묵인된다. --- p.48

멜빈 코너는 !쿵족은 갓난아이와 엄마 사이의 유대 관계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아이와 엄마는 항상 신체적으로 붙어 있는 채로 지낸다고 이야기한다. 아기들은 엄마의 골반에 어깨까지 걸친 아기 포대에서 지내는데, 배가 고프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엄마 젖을 먹을 수 있다. 또한 꼼지락거리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꽤 넓은 편이며, 아기는 엄마 주위를 활발하게 돌아다니면서 빠른 시기에 스스로 걸어 다니게 된다. 그 결과 일반적인 !쿵족의 아기들은 비교 대상이 된 서양의 아기들에 비해 운동 능력이 뛰어났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행해졌는데, 한국에서는 미국에 비해 아이를 혼자 두는 시간이 훨씬 적으며 생후 2개월 후에 가장 심하게 우는 경향도 없고 밤에도 훨씬 적게 우는 등 울음의 경향성도 확실히 다르다. 메레디스 스몰의 연구에 따르면, 생후 1개월 된 한국의 아기들은 일과 중 혼자 있는 시간이 8.3%에 불과하지만, 같은 연령대의 미국의 아기들은 67.5%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미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울 경우 46% 정도는 고의로 무시했다. --- p.66

여성의 순종적 성향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관점에 비서양 페미니스트들의 반론이 제기되면서, 여성에 대한 분석에서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그리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으며 성별, 계층, 인종 간의 상호작용과 사회의 복잡성이 주된 연구 주제가 되었다. 성별 차이는 다른 수많은 사회적 차이의 하나로 여겨지기 시작했으며, 여성과 여성의 반대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예를 들어 올리비아 해리스는 볼리비아 안데스 지역 레이미족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레이미족은 남과 여의 구분보다는 야생과 길들여진 것의 구분을 더 중시했으며, 이러한 구분에서 남녀의 차이는 없었다는 사례를 오트너의 이분법적 관점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 제시했다. 레이미족은 말을 배우기 이전의 영유아는 야생의 존재라고 생각해 머리도 자르지 않았다. 비슷한 관점에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야생에 가깝다고 보았으며, 결혼을 해서 노동과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하는 부부를 그들 사회 체계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으로 여겼다. 그 사회의 상징과 조직 체계는 이분법에 근거해 구성되었지만, 이는 성별이나 연령에 따른 구분이 아니었다. 해리스의 연구는 외부의 기준으로 여성 문제를 다룰 때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 p.80

유년기 연구자들은 두 가지 주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첫째, 유년기는 사회 현상이다. 둘째, ‘성장’이라는 말에는 사회적 성장의 뜻도 있으며, 이는 그 사회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 성장이 끝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어린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성별, 연령, 출생 서열, 민족에 따라 어린이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사회 간에는 이 차이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민족지 연구자들은 일찍부터 유년기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어린이들의 삶의 차이를 논의했으며, 수많은 사회의 어린이 관념을 분석했다. 이 장에서는 “어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과 유년기를 이해하는 갖가지 방법을 알아본다. 어떤 사회에서는 유년기라는 개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또 어떤 곳에서는 어린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한다. 유년기를 인생에서 가장 흠 없고 완전한 시기로 생각하는 사회도 있다. 그만큼 유년기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여러 민족지 사례를 살펴보면 어른과 어린이는 명확하게 선을 긋듯 구분하기 어렵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회화 과정이 끝났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비록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유년기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 p.98

유년기의 성격을 규정하고 유년기의 경험을 구별 짓는 요소는 그 외에도 더 있다. 일부다처제, 엄마의 지위, 친척의 수, 사생아 등의 요소도 아이의 신분을 결정하고 유년기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가족 내부에서의 출생 서열도 중요하다. 이미 가족 구성원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상태에서 원하지 않게 생긴 아이는 맏이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자라기 쉽지 않다. 장자 상속제 사회의 경우,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게 될 장자(대부분 남자다)는 다른 형제자매와는 완전히 다른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마이어 포르테스는 가나 북부 탈렌시족의 사례에서, 첫째가 아들이냐 딸이냐에 따라서 부모와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며, 부모의 장례식에서 맡아야 할 책임은 얼마나 다른지를 소상히 기록했다. 반면 말자(末子) 상속제 사회에서는 막내에게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며, 가족의 땅과 재산은 모두 막내에게 상속된다. 또 어떤 사회에서는, 어린이들이 주로 형제자매가 아니라 연령 집단과 어울려 지낸다. 이 경우 형제자매끼리도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해 있다고 보며, 가족 및 공동체에서 맡는 역할도 크게 달라진다. --- p.104

대만 어린이들은 위의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 대만 엄마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심어 주는 학교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자녀들의 보호보다 교육을 우선시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들이 자녀들의 안전에 무심한 듯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엄마들은 자녀를 모범적인 시민으로 만들어 준다는 이유로 학교 교육에 찬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들을 품에서 내보내기 싫어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양면성은 어린이의 생일을 축하할 때도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축하를 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들의 보호에서 한층 벗어난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 가능성”을 우려하기도 한다. 스태포드의 연구는 어린이를 보는 관점이 반드시 ‘이미 인간이다’와 ‘아직 인간이 아니다’의 두 가지로만 나뉘는 것은 아니며, 상호모순관계로 보이는 복수의 양육관이 반드시 상호 배척관계는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 준다. --- p.116

일본인들은 자녀에게 많은 애정을 쏟지만, 개인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며 자녀에게 집단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헨드리는 일본인이 자녀 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시츠케(仕付け)’이며, 이는 “사회의 일원(문자 그대로 한 명의 사회 구성원을 뜻한다)으로서 몸에 익혀야 할 생활 방식과 예의범절”이라고 했다. 일본의 부모들에게 양육이란, 자녀들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간직한 채로 전체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게 하는 일이다. 일본 어린이들은 대체로 부모의 품에서 안전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점차 조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란다. 공동체 안에서는 공동체에 순응하는 법, 구성원과 결속을 다지는 법,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단결하는 법을 배운다. 또한 성별과 연령에 따른 위계질서를 배우고 그에 맞는 예의범절을 익힌다. 헨드리는 이처럼 일본인들이 공동체를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일부 서양권 학자들은 이를 두고 ‘어린이를 로봇이나 기계처럼 만들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은 너와 동등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바람도 네 것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개인의 욕구보다는 사회의 결합력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어린이 개인의 권리를 강하게 억누르는 것이다. --- p.120

현대 서양 사회에서는 어린이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생산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설령 자녀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조그만 용돈벌이 정도로 여길 뿐, 가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역사학자 비비아나 젤리저는 북미에서 어린이의 존재가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존재에서 정서적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존재로 바뀌게 된 시점이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북미에서 어린이들을 보는 관점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일정한 몫을 담당해야 할 의무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 ‘거들어 주는’ 정도로도 많은 감사와 칭찬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손님”이라고 이야기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린이에 대한 부모의 경제적 관념은 부모의 계층과 어린이의 성별에 따라 달라지며, 부유층 혹은 특권층 부모일수록 자녀들을 돈벌이와 노동의 세계로부터 보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 재정된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는 모든 어린이가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유년기의 이상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어린이들이 노동을 하고 있으며,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가계 경제에 든든한 도움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부모도 많다. --- p.127

대부분의 사회에서 어린이는 상당한 기간 동안 어른의 보살핌과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로 생각하지만, 이는 결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이 아니다. 이크족처럼 커다란 참사가 벌어진 지역이나, 브라질의 슬럼가 파벨라 지역처럼 경제적 빈곤이 고착화된 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불가능할 때도 있으며 그 때문에 버려지거나 외면당하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로부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철저하게 실용적인 목적으로 낳기도 하며, 두 가지 모두를 바라고 낳을 수도 있다. 부모 자녀 관계는 본질적으로 상호 관계이며, 자녀는 부모와의 상호 관계를 생산적이고 정서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어린이는 태어나면서 부터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의무와 권한이 뒤얽힌 사회적 거미줄 위에 놓이게 된다. 비록 어린이 개인은 이 사실을 깨닫는 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유년기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그러한 관계망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p.146

배아에서 태아로, 태아에서 다시 갓난아기로 넘어오는 경계선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경계는 그 대상이 사람이냐 아니냐, 혹은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때가 많다. 그 기준은 문화에 따라 달라지며,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린 모건은 “‘태아’는 과학적으로 규정되는 ‘생물’이라기보다는 문화에 의해 규정되는 관념적 실체이며 (…) 특정한 문화적 배경 위에서 태어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아기는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완전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현대 가톨릭의 입장이다), 조금씩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생명체로 여겨질 수도 있고, 때로는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달이 흘러도 온전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한 사회 안에서도 태아를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과 태아의 지위에 합의된 견해가 없을 수도 있다. --- p.151

인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태아를 민족지 조사에 포함시켰으며, 태아의 수정과 임신 과정에 대한 사회적 관념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한 관심이 유년기 관념과 어린이들의 삶까지 확장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아기 정령, 수정과 번식에 관한 고유의 믿음, 의사분만 의례에 대한 묘사 속에 간접적으로 어린이가 등장할 뿐, 어린이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 조사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유년기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문헌을 통해, 유년기의 시작에 관한 해체적 분석이 어린이의 사회화 과정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 p.194

과거 인류학자들은, 자녀의 사회적 지위는 생물학적 부모를 따라 정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요즘은 사회적 부모와 생물학적 부모를 구분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입양과 같이 아이를 낳지 않고서도 가정을 이루거나 부모 역할을 하는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그처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입양을 하면 자녀의 신분과 집안이 완전히 바뀐다고 보았으며, 기존 가족은 더 이상 떠난 자녀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않고 상속권을 물려주지도 않았으며, 그 책임과 권리는 새로운 가족이 대신한다고 보았다. 서양 사회에서는 미성년자가 입양될 때 법적인 신분도 완전히 바뀌는 것으로 생각한다. 잭 구디는 “자녀의 부모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며, 부모와의 관계가 ‘태생적인’ 관계에서 ‘인위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똑같은 부모다”라고 서양의 입양을 정리했다. 때로는 성인이 된 이후 입양이 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상속권을 비롯한 법적인 권리 변화는 미성년자를 입양할 때와 동일하다. --- p.204

최근 유년기 인류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연구 대상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보호소나 길거리처럼 가정 바깥에서 사는 어린이들이다. 특히 거리에서 부랑생활을 하는 어린이는 ‘어린이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이상적 관념과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에 NGO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남아메리카에서 가난과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쳐 나오거나 가족들에게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어린이들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는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경제 개발의 어두운 단면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 p.223

놀이 역시 유년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다. 놀이는 특별한 목적 없이 오로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활동이기에 어른들의 세계에는 없는 어린이다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놀이는 중층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해당 사회의 사회화 과정의 특성, 그리고 직업과 어린이에게 허용된 경제 활동의 수준까지도 함께 고려해서 연구해야 한다. --- p.252

한편 놀이는 사회적 긴장 관계와 그에 따른 격렬한 감정 표현을 숨기거나 드러내기도 한다. 진 브릭스는 이누이트 연구에서 놀이가 수행하는 이중적 역할을 살펴보았다. 그에 따르면, 되도록 대립 관계와 격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사회에서는 연극 놀이가 그것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집단 내부의 문제를 진심으로 표면화시키기보다는 놀이라는 수단으로 해결함으로써, 어른도 어린이도 다양한 갈등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또한 어린이는 밖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법을 배운다. 예를 들자면 애착의 감정이 과격한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적대적인 감정이 호의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침으로써, 적절한 상황 판단 능력과 올바른 대처법을 배우게 된다. --- p.269

현대 서양에서는 일과 놀이의 개념이 분리되어 있다. 어른은 일하고 어린이는 논다는 관념은 특수한 문화적·역사적 배경에서 빚어진 관념이다. 인류학자들은 어린이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하고, 나이가 다르다고 해서 똑같은 활동이 누구에게는 일이 되고 다른 누구에게는 놀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어린이는 생산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소비자일 뿐이라는 견해에 반론을 제기해 왔다. 또한 놀이와 사회화와 일은 그 경계가 상당히 불분명하며, 일과 놀이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지역이 많다는 사례를 보여 주었다. --- p.278

어린이들의 말과 놀이와 일을 연구하면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은 물론 해당 사회의 어린이 인식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는 말을 배우면서 자기 사회의 분류 체계와 문화와 세계관을 배운다. 양육자와 어린이 사이의 대화와 행동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어린이 개념과 위상을 알 수 있다. 놀이 연구도 어린이 삶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주고, 유년기의 성격 규정 및 해석에 도움을 준다. 또한 놀이는 어린이들이 기존 문화를 흡수하고 변형하고 창조하여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 준다. ‘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있는 소녀’라는 대상에는 다양하고 중층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저 송아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녀만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장래를 위해 미리 직업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가계 경제에 보탬을 주기 위한 생계 활동을 하는 중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춰 여러 가지 여자로서 해야 할 일을 배우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일과 놀이는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넓은 맥락에서는 일과 놀이가 모두 사회화 또는 교육이다. 유년기는 배움의 시기인 동시에 다툼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툼을 조정하는 모습도 유년기의 일과 놀이와 말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 p.287

아동사회화 과정을 연구한 인류학자들은 훈육을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훈육은 민족지 연구에서 어린이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 장에서는 유년기와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체벌 및 훈육 방법에 얼마나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어린이에게 사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훈육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나므로 어린이에게 체벌이나 훈육은 필요 없다고 보는 사회도 있는 반면, 전통적인 기독교 사회와 같은 곳에서는 사람은 악하고 죄지은 상태로 태어나므로 체벌은 어린이에게 당연히 필요하다고 여겼다. 현재 서양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신체적 체벌을 비상식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어린이를 때리는 그 밖의 사회에 관한 묘사가 눈에 거슬리거나, 그런 체벌에 동의하는 인류학자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아동 학대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이 장에서 인용한 여러 체벌 사례를 학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용납할 수 있는 체벌과 그렇지 않은 체벌의 기준은 대단히 미묘한데다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 p.290

훈육과 체벌은 육아의 여러 측면 중에 두 가지 요소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을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유년기의 본질은 사회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사실과, 유년기라는 사회 현상은 문화적 배경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와 훈육과 체벌 방법은, 해당 사회의 어린이 인식과 역할과 위상에 따라 달라진다. 어린이에게도 부모의 폭력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관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인류학자들은 체벌과 훈육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요즘은 체벌과 학대를 떨어뜨려놓고 논의하지 않는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조사 지역에서 가혹한 체벌 장면을 보고 불편한 심기를 가졌었으며, 그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과 문화상대주의적 관점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 p.330

서양이 만든 유년기 개념의 중심에는 ‘어린이는 성적으로 순결하다’는 이미지가 들어 있다. 어린이들이 성을 모르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린이는 성을 느끼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는 있어도, 유년기를 보호 받아야 할 영역으로 여기는 이상 어린이의 성에 관한 논의는 요원하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는 성적인 생각과 경험이 급증하는 시기로 알려져 있으며, 어른들의 우려가 커지고 통제가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어린이의 성은 21세기 서양 사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이며, 어린이의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을 논의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기존 인류학 연구가 별로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룰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양에서 보편적이라 생각하는 생물학적 충동이 다른 곳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린이를 성적으로 순결한 상태로 지켜 줘야 한다는 관념 역시 어디서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비교문화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는 점이다. ---- p.334

현대 서양에서는 성적 경험과 성 정체성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성적 경험이 자기 정체성에서 차지하는 부분도 커서, 동성애자니 이성애자니 하는 이름표는 사회적·개인적 정체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사회역사학자 제프리 윅스는 “어째서 우리 사회는 성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출산의 도구로도, 순수한 즐거움의 원천으로도 여기지 않고, 오로지 우리 내면의 진실을 감춰두고 있는 비밀스런 영역이자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여기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서양에 던졌다. 하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는 섹슈얼리티가 항상 정체성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태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게이의 정체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서, 1980년대 말에 HIV/AIDS가 유입된 반작용이었다. 그 이전에는 동성간의 성적 행위가 관용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남자끼리의 성적인 행위가 허용되었고 때로는 즐기기도 했으며, 그 때문에 혼인을 못하거나 자녀를 갖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개인의 정체성은 섹슈얼리티보다는 혼인관계와 자녀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 p.339

청소년기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개념이다. 청소년기는 유년기처럼 신체적 변화와 발달 과정에 연관된 개념이지만, 신체적 변화와 사회적 청소년기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혹은 존 휘팅과 베아트리체 휘팅이 주장했듯이, “청소년기의 신체적 변화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그 신체적 변화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반응은 공통적이지 않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회적 발달 단계로서의 청소년기가 신체적 사춘기와 맞물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청소년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분명한 생물학적 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녀들은 첫 월경을 청소년기 시작의 지표로 삼을 수 있을지 몰라도, 소년의 경우에는, 비록 피터 릭비처럼 몽정을 지표로 삼자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지표를 정하기가 어렵다. --- p.371

유년기와 마찬가지로 청소년기의 정의역시 단정할 수 없으며 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청소년기는 유년기도 성인기도 아닌 변화와 전환의 시기이며,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성인식은 유년기와 성인기를 나누는 기준으로 어느 정도 유효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기준은 될 수 없다. 비록 과거 인류학 이론과 민족지 연구에서는 성인식 의례의 의미와 기능과 상징이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류학의 주요 연구 주제를 분석하고 다양한 의례를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인류학자들이 유년기에서 성인기로의 전환 과정에 (비록 간접적이더라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인식이 유년기의 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린이의 위상과 역할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대체로 청소년기는 유년기와 성인기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는 전환기이며, 어린이들이 과거의 행동 방식, 태도, 사회적 지위 등을 내려놓고 앞으로의 인생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과 행동을 배우는 시기다. --- p.417

인류학이 어린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전반적인 서양 사회의 관심이 반영된 결과다. 실제로 인류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전체 생애 주기에서 노년층보다는 유년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노년의 의미를 탐구하거나 노년층을 대상으로 민족지 연구를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이 역시 앵글로아메리칸 사회의 노년 관념이 민족지의 연구 대상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결과다. 한때 어린이들을 경시하고, 주변부로 취급하고, 경제적으로 쓸모없다고 여기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이제는 노인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죽음과 장례는 많이 연구했지만, 그에 비하면 노년층(특히 여성 노년층)의 현재 생활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 인류학적 관심이 커질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가 어린이들을 두고 벌였던 논쟁은 언젠가 다시 노년층을 상대로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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