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변한 게 없었다. 아니, 변한 게 있었다. 가로수와 전봇대, 신호등의 그림자들이 직립으로 서 있다가 붉은 석양 아래 네 발로 걷는 듯 길게 뻗어 있었다. 명수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오늘 하루 유실되지 않고 열심히 따라왔구나.’
---「유실물」중에서
20대 자살률이 높은 이유를 준혁은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했다. 취업 스트레스,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압박감 등이 나왔다. 참조해서 함께하려는 이유로 보냈다. “극심한 우울증, 도저히 혼자선 용기가 나질 않네요. 외로운 저승길, 좋은 분들과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직접 체험의 중요성」중에서
“하지만 자살의 경우는 달라. 죽어볼 수 없잖아. 결국 간접 체험할 수밖에…… 자살에 관한 여러 자료를 들여다봐. 요즘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면 각종 블로그나 카페에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정, 시도한 경험, 자살자에 대한 뉴스 등 많이 뜨잖아. 그리고 자살하니까 떠오른 건데 요즘 동반자살이 핫하다고 하대. 하지만 뜨는 테마라고 무작정 덤벼들어선 안 돼.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지.”
---「호랑이 소굴과 덫」중에서
혜경은 죽을 때도 야하게 죽고 싶었다. 터진 미니스커트에 핑크하트 컬칩 레이스가 드리워진 블라우스 첫 단추가 풀린 채…… 관 속으로 들어가기 전 면도도 해주었으면 했고, 하트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허벅지 털도 깎아주었음 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바람 불고 비 내리고, 화장도 안 했는데 곱게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거울의 립스틱 자국은 점을 넘어 선이 되더니 알 수 없는 그림이 되어갔다.
---「내일도 해가 뜰까?」중에서
지하철은 각자 고독의 깊이만큼 달린다. 나에게는 팔을, 너에게는 다리만을 줄 것을 우리는 다 갖추었기에 혼자다. 종로 3가에 내릴 그는 종로 5가에 내릴 나와 무슨 상관이랴. 없어지면 없었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우린 칸칸으로 실려가다가 역 차이만큼 세상을 뜬다.
---「그림 속 강아지 발」중에서
구석은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더이상 나아갈 필요도 없는 곳이다. 세상은 구석을 향해 닫혀 있지만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세상 힘든 것들 구석으로 몰리건만 구석은 묵묵히 그 어깨들을 받쳐준다.
---「청춘열차」중에서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어도 우린 한날한시에 손잡고 갑니다. 저승길이 멀다 해도 함께한다면 결코 힘들거나 외롭지 않을 거예요.”
---「신발」중에서
죽음을 앞둔 이의 마지막 심경을 실시간 관찰하고 이승에서 남길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음은, 그것도 임종을 앞둔 말기암 환자들이나 노인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20대 청춘, 그것도 무려 여섯 명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한꺼번에 듣는다는 건 그 어떤 신세계를 탐험하는 일보다 더 짜릿한 경험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데카메론」중에서
순식간이었다. 조폭이 경계를 풀고 있는 사이, 혜경은 그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다. 조폭은 쓰러졌고 깨진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장판을 적셨다. 안절부절못하는 준혁은 몰래카메라 쪽으로 다가가 ‘교수님! 경찰! 경찰!’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가위바위보」중에서
허공에서 사선과 원을 그려내는 망치와 덜렁거리는 의수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주택은 현아를 시작으로 혜경, 영욱, 슬기를 차례대로 내려쳤다. 망치와 의수가 덜렁 쿵, 덜렁 쿵 할 때마다 퍽, 퍽 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 주택과 쓰러진 회원들은 안개 속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보였다.
---「한 방 블루스」중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선택이 필요 없을 때는 차라리라는 낱말은 쓸 수가 없다. 차라리를 쓸 수 없을 때는 생의 천칭도 평형을 이루니 더이상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