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에서의 ‘한국적’인 것의 의미가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 것처럼, 그 대안으로서의 ‘실험’의 의미 또한 단정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실험미술은 그러므로 ‘한국적 모더니즘’은 아니나, 과거 혹은 타국의 어떤 모더니즘과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한국의 모더니즘’이다. 나아가 그 존재의 면모는 현재의 모더니즘, 반(反)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이해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한국의 실험미술은 보편적 세계 미술사라는 전제로는 규명이 불가능한, 그저 실험미술인 것이다.
--- p.28, 「조수진 - 전위의 실험에서 실험미술로: 대안적 한국 모더니즘의 역사」 중에서
한국 작가들이 현대미술 비엔날레의 데뷔 무대로 1961년 파리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했을 때 작가, 비평가, 언론에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국제 미술계에 진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올림픽’ 입성을 축하했다……한국의 이 젊은 실험미술가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사진 분야의 선구자들로서 매체와 과정에 대한 획기적인 접근 방식으로 당시 빠르게 변화하고 세계화되어 가는 사회정치적 지형과 물질적 조건을 매체와 작업 과정에 반응하고 반영하였다. 이렇게 이들은 하나의 미학이나 매체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연합하였다.
--- p.30, 「안휘경 - 지구촌: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중에서
한국의 실험미술이 실험적이었던 이유는 작품이 출세지향적인 현대화에 회의적이고 극단적 합리주의의 위험에 예민한 중산층의 관점에서, 전후 대한민국의 정부, 일상, 문화 전반을 보증하던 가장 불안한 개념들을 은유적으로 시험하려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소상공인, 지식인, 사무직 노동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추상 개념이었던 중산층은 1960년과 1980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실험 미술가들은 다른 면에서는 정확히 중산층에 속했지만 소위 문화적 전위로 용인되던 신념에는 깊은 회의감을 표현했다.
--- p.49, 「조앤 기 - 한국 실험미술, 무엇이 실험적인가?」 중에서
청년 작가들이 세우고 싶었던 새로운 존재 질서는 이처럼 총체화를 요구하던 시대만큼 총체적이었으나, 감성의 지평을 여는 방식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전위의 확장과 실험을 통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미술계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일탈과 유배가 시작되자, 이들이 꿈꾸었던 전위적 혁명은 미완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부상한 단색화와 극사실회화, 1980년대의 민중미술의 양식 투쟁 사이에서 이들은 다만 잠재태의 형식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중반 다양한 소그룹 운동의 신세대 미술이 등장하며, 설치와 미디어, 학제간 융합형 프로젝트 등이 시도되면서 현재 이들은 한국적 원형으로서 다방면으로 소환되기 시작했다.
--- p.80~81, 「강수정 - 전환과 역동의 시대: 아방가르드-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중에서
찐득찐득한 점액질의 물질성과 광포(狂暴)한 느낌을 자아내는 거대한 캔버스 안의 스산한 풍경들. 전쟁 세대의 산물인 비정형 회화가 ‘몸성(性)’에 기반한 물질감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4.19 세대에 해당하는 《한국청년작가연립전》과 AG, ST는 다 같이 개념미술(conceptual art)로 향하는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60년대 후반부터 예술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태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태도는 오브제, 설치, 해프닝 등 ‘탈평면’의 방법론을 통해 화단에 확산되었는 바, ST에 이르러 보다 정교하게 세분화됐기 때문이다.
--- p.238, 「윤진섭 - 전위와 실험: 1960?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해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