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무중력 상태에서 중력을 느껴야 하는 행위이므로 그 시 속에 지금의 ‘나’를 상정해야 의미가 생생해지면서 감동이 온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이 느껴지면 그게 명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주체인가? 이념으로 포장된 환영을 좇아서 청장년 시기를 보내고 지금은 회한만 남아 한숨 쉬고 있는 늙은이다. 가슴을 치며 후회해봤자 지난날은 다시 오지 않을뿐더러 이제 다시 환상을 좇을 힘도 없는 나이다. 『구약성경』 「요엘서」(2:28)에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했는데 꿈이 없으니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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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고생스럽게 사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렇게 간구하는 풍요로움이란 기실 불행의 시작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풍요로움에서는 허락되지 않음이 이미 수많은 선지자에게 검증되지 않았는가. 「마태복음」의 명언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다.
『주역周易』은 고난을 모두 이기고 건너간 기제괘旣濟卦를 완성으로 정의하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미제괘未濟卦라는 미완성의 단계를 하나 더 두고 마친다. 인생이란 한 번의 완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삶을 계속 유지하려면 살아야 할 적극적인 동기를 가져야 한다. 그 동기가 바로 결핍으로서 미제괘에서 말하는 고난과 불행이니, 이것이 있어야 한 번 더 순환의 고해 속에 과감히 뛰어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거기에는 버리거나 피할 쓰레기는 없다. 이웃을 이겨먹는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오늘날의 대부분 사람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노년에 이르러 꿈꿀 기력도 없는 ‘나’가 위로를 받고 미제괘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당대 시인들의 갈고닦은 언어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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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일찍이 “모든 편지는 수신자에게 도달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편지를 받을 어느 특정한 타인이 아니라,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관념 속에서 그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가상의 존재, 즉 대타자야말로 편지의 궁극적인 수신자라는 뜻에서다. 시인은 “누구라서 내 마음을 대신 밝혀줄 수 있을까”라고 한탄한 듯하지만, 이 말로 시를 마감한 순간 그의 신원伸?은 사실상 완성되었다. 이것이 이 시의 반전이다.
--- pp.46~47
석별의 아쉬움이니 이별의 아픔이니 하는 말들이 겉으로는 고통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일종의 쾌락이다. 사람이 진실에 다가갔다고 여길 때가 바로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칠 때처럼 가장 기쁜 쾌락의 순간이 아닐까? 내가 친구와의 우정을 확인하고 울컥하는 순간, 우리는 술로써 이를 영원히 동결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이별의 쾌락이 이제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미치면 쾌락의 극과 함께 슬픔이 도래한다. 이 슬픔을 떨치려면 ‘한 잔 더 비워야 한다’(更盡一杯酒). 그래야 쾌락의 기한을 더 연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p.135~136
화려한 주택과 별장,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 등 엄청난 소비에 수백억을 쓰는 사람을 위대한 영웅으로 받드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치를 위해 몸을 바치고도 그 대가로 주겠다는 천금을 웃으며 거절하고 떠나는 필부를 영웅으로 추앙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공놀이 하나로도 재벌이 되고 영웅이 되는 세상에서 노중련의 삶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은 그야말로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겠지만, 이백과 돈키호테가 추구하는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의미 있게 사는 삶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 p.146
즐거움이 언어로 표현되면 더욱 아름다워지려 해서 노래와 음악이 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치세지음治世之音이든, 난세지음亂世之音이든, 망국지음亡國之音이든 노래는 일단 부를 때 쾌락을 불러일으킨다. “득과 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하고, 천지를 움직이며 귀신을 감응시키는 일에 어떠한 것도 시보다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없다”(正得失動天地感鬼神, 莫近於詩)는 「서」의 단언은 바로 이 뜻이다. 깨달음과 감동은 동시에 일어나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백)이 부르려는 노래를, 흔히 평론가들이 주장하듯, 굳이 당시의 난세나 이백의 소외된 처지를 반영한 비분강개함 등과 연결지어 천착할 필요는 없다. 노래는 그저 즐거움의 표현으로 보아야지 거기에 의미를 개입시키면 명쾌함을 추구하는 일이 되는데, 이는 디오니소스의 일이 아니다. 의미를 찾는 일은 밤에 할 일이 아니고 낮에 할 일이기 때문이다.
--- p.160
사람들은 행복을 위하여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아무리 추구해도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오히려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그 목표는 더 멀리 달아나 있기만 하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이미 얻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산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 돈을 들여 세계적인 명승이나 휴양지를 찾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오면 지겨운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고된 바다는 망망하게 끝이 없지만, 머리만 돌리면 그 순간 거기에 뭍이 있다”(苦海無邊, 回頭是岸)라는 불교의 경구가 있다. 일상이 지겹고 따분한 것 같아도 기실 이것이 삶에서 더 중요할 뿐 아니라 행복도 가져다준다. 산해진미를 찾아다니며 맛보는 식도락가들도 궁극에는 집밥으로 돌아온다. 남보다 더 잘나 보이고 행복해 보이려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겉을 꾸미지만, 꾸미고 나면 언제나 그 안쪽에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생긴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 pp.238~239
삶이란 기실 순간순간을 환상으로 살아가는 게 본질이다.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산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환상으로만 살아가면 자칫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 있으므로, 이를 방어하는 기제가 자기 반성과 메타meta 인식이라는 기능이다. 자기 자신의 객관적 모습을 알기 위한 것이다. 너무 환상에 절어 살아도 곤란하지만, 반대로 자신에 대한 메타 인식이 너무 강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속된 말로 ‘내 꼴이 찌질’하니까 거기에 맞춰 대충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이 온전할 수 있을까? 시인도 피난살이에 지쳐 있는 상태이니 다른 생각 말고 그냥 먹고살 궁리만 하며 살아야 할까? 아무리 피난살이라 하더라도 삶은 삶이므로 아무런 환상이 없이는 고된 삶을 이겨 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슨 좋은 일 하나 있을 처지도 아니니까, 거대한 환상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등불 심지의 작은 화신에 기대어본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지금 희망이라는 환상을 만들어야 내일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뭣 하려고 심지에 꽃불 일어나는지 굳이 기다리나?”라고 겸연쩍은 듯 물었지만, 이게 삶의 본질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다. 고난을 이기는 힘이기도 하고.
--- pp.286~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