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장소를 이해하는 방식은 걷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걸으면서 만나는 글자들을 보는 것이다. 큰길만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로는 장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오래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비하면, 곧고 크게 닦인 길은 소리도 냄새도 폭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걷기 좋은 도시를 좋아한다. 국내든 해외든 어느 도시나 오래된 원도심은 걷기 좋다. 골목길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걸었다. 만들어진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걸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골목길은 즉흥적일 수 없다. 골목길은 사람과 세월의 감각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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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선거 기간 동안 거리에 펄럭이는 수많은 현수막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꼈을까. 혼란스럽고, 산만하고, 돈 아깝고,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국의 시대에 일회용 현수막을 자랑스럽게 내거는 후보들의 생태 감수성이 무척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끄럽고 불편하고 쓰레기를 잔뜩 만들어내는 선거운동은 누가 허락한 것일까. … 지킬지, 못 지킬지, 안 지킬지 알 수 없는 공약을 커다란 바위에 정성스럽게 새길 일은 없겠지만, 현수막에 남발하는 것을 보면 공약 자체도 일회성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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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것보다 새것이 더 쉽고 편한 세상이 되었다. 새것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일상의 제품에서부터 거대한 도시로까지 번진다. 도시도 고쳐 쓸 수 있을까. 새것을 만드는 일도 훌륭한 디자인이지만, 고치는 일도 그에 못지않은 디자인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디자인이다. 생각해 보니 심지어 인류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우주를 바라본다. 지구를 고쳐 쓰기에는 이미 늦은 것일까. 일단 내 주변의 고장 난 물건을 고쳐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고치는 게 습관이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 우리는 고장 난 지구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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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축제의 캐릭터 ‘치킹’과 ‘치야’가 등장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소녀 감성을 가진 수탉, 따뜻한 감성의 몸짱 닭’ 치킹. ‘카리스마 넘치는 센 언니 이미지의 여친 닭, 도도하지만 귀여운 맏언니 스타일’ 치야.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우리가 먹는 닭은 모두 암탉이다. 수컷은 병아리 때 감별되어 다른 동물의 사료가 되기 때문에, 애초에 수컷 몸짱 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암탉은 그림처럼 날씬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고기가 되어야 하는 암탉의 사육 환경에 대한 묘사는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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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전용 서체가 없는 것은 행운이다. 앞선 사례를 참고하고 단점을 보완하면 더욱 명확하게 방향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많은 지자체 전용 서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 문화를 강조하는 의미 중심의 스토리텔링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령 2·28민주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민주주의를 서체로 표현한다거나, 중구 근대 골목이 가지는 근대 문화를 시각화한다면 난감한 일이다. 수성못과 앞산, 신천과 팔공산 등의 지리적 요소를 서체에 담아낸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결국 지자체장이나 개발자의 의도가 지나치게 담기게 되어 일방향의 무리수를 두는 디자인이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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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다. 어느 국어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자는 ‘민주적’이다. 폰트를 자주 사용하는 북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무료 폰트일수록 더욱 신경 써서 만들어달라는 정도다. 무료 폰트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많은 사람이 공짜라서 쉽게 다운받아 사용하는데, 괴상망측한 폰트를 사용한 문서들은 보기 괴롭다. 대충 만들어서 공짜로 배포하는 것은 말하자면 ‘도둑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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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을 지불해야만 환대받는 공간이 많아질수록 시민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줄어든다. 햇볕을 쬐는 노인을 위한 공원과 벤치, 스터디카페보다 쾌적하고 멋스러운 공공 도서관, 접근성이 좋고 안전한 산책로, 부모의 소득 차이로부터 자유로운 어린이 놀이터 등을 고민하는 것이 도시 디자인이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으려는 사려 깊은 공공 픽토그램, 저시력자나 휠체어 이용자를 고려한 정보 그래픽도 도시 디자인이다. 우리가 숨을 쉬며 공기를 의식하지 않듯이 복잡한 도시에 살면서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고도의 도시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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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the common life(보통은 무엇인가요)?” FDSC 회원과 예비 신입 회원 마흔여 명이 모인 제로 웨이스트 숍 더커먼 외벽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문장이다. 끊임없이 자문한다. 무엇이 보통의 삶일까. 그 안에서 오고 가는 ‘특별한’ 대화와 제안, 선언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성차별 없이, 지역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몸짓과 목소리로 멋지게 활동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자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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